대만인, 미국에 대한 회의론 커졌다

2024-01-22 10:45:44 게재

뉴욕타임스 "'과거 배신 전력' 트라우마에 자국 이익만 챙긴다는 시각"

최근 친미파로 분류되는 후보가 대만 총통에 당선됐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대만인의 회의감은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21일 "중국이 공세적으로 대만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편, 미국은 세계문제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지를 놓고 내부적으로 분열하는 상황"이라며 "대만은 자국 정부나 중국의 계획보다 미국의 의도에 대한 의구심에 휩싸여 있다"고 전했다.

최근 대만 총통선거에서 집권 민진당의 라이칭더 부총통이 승리한 것은 그가 미국을 가까이 끌어당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로 인식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13일 대만 집권 민진당 라이칭더 총통후보의 승리에 기뻐하는 지지자들. AP=연합뉴스


선거 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만 국민 대부분은 중국을 자극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무기를 더 많이 구매하는 방안에 대한 대만인 지지도는 최근 늘었다. 대만인들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대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우려한다.

NYT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원조를 주저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대만인들은 미국이 위기상황에서 대만을 위해 실제로 무엇을 할 것인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앞서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34%만 미국을 신뢰할 수 있는 국가라고 응답했다. 이는 2021년 45%에서 감소한 수치다.

최근 대만인들의 온라인 담론을 주제로 한 연구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보여준다. 미국이 실질적으로 대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힘 또는 관심이 부족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예측하기 힘든 운전자로 인식하고 있다. 안전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운전대를 놓아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만과 미국의 분석가들은 미국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신하지 못한다. 일부 사람들은 자체 자위력을 강화겠다는 대만의 의지가 커질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긴박감이 옅어지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생존이 미국에게 달려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대만을 구하러 달려올지 알 수 없다면 노력이나 의지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대만을 중국에 빼앗기면 중국이 아시아를 지배할 수 있는 더 큰 힘을 갖게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대미 불신으로 대만이 더 쉽게 중국에 넘어가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국 스탠퍼드대와 미국기업연구소(AEI) 국제학 연구원 오리아나 스카일라 매스트로는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며 "대만인이 중국의 위협에 얼마나 잘 버티는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연구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대만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래 버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려질 수 있다는 강박관념

미국에 대한 대만의 불신은 사실 오래 됐다. 미군은 1950년부터 주둔했고 이는 영구적인 것처럼 보였다. 1971년만 해도 약 9000명의 미군이 대만에 주둔했다. 하지만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979년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미군이 떠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군 법률고문으로 일했던 에바 왕은 "1979년 미국 관리들이 마지막으로 성조기를 내렸던 날, 대만의 운명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울었다"고 말했다. 에바 왕의 남편이자 전직 검사인 웨인 첸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을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만약 전쟁이 실제로 발발해 중국이 쳐들어온다면 미군은 우리를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만 연구자들은 1979년 상황이 대만인들의 생각을 계속 지배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미국에 대한 대만인의 불신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싱크탱크 '미국-대만 워치' 편집자 자스민 리는 "오늘날 대만 내부에서 제기되는 회의론은 주로 미국이 대만을 버리는 것에 관한 것"이라며 "대만인은 이전에 버림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같은 회의론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1979년 이후 대만 사안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대만인의 대미 불신이 지속되는 이유다. 게다가 2021년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국의 파병 불참 결정 등은 미국에 대한 대만 여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 스탠퍼드대 매스트로 박사는 "대만인의 대미 불신은 일정 부분 이해하기 어렵다"며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아 대만 여론이 악화됐지만 사실 미국은 대만을 방어할 준비를 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전쟁에 주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버려질 수 있다는 우려만 있는 건 아니다. 대만의 한 싱크탱크가 2021~2023년 미국과 관련한 대만인의 온라인 담론 84개를 분석한 결과 다양한 의견이 제기됐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멀리 떨어진 대만을 방어하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주장을, 또 다른 이들은 미국이 혼란을 야기하는 파괴적인 세력이라는 주장을 내놨다. 혹자는 미국이 반민주적인 '가짜 친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만 여론을 연구하는 타이베이 쑤저우대 사회학 부교수인 판신신은 "자신의 운명에 별다른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이 대만인 정체성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대만은 미중 관계의 기로에 있다. 중국은 대만을 무력으로라도 되찾아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대만을 지킨다는 미국은 수천마일 떨어져 있다. 2021년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다수의 미국인은 대만 방어를 위해 군대를 파병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원 53%는 '미국이 세계 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다.

판신신 부교수는 "대만에는 반미주의가 없다"며 "하지만 미국에 대한 회의론은 상당하다"고 말했다.

개인적 경험도 대미 불신 여론 일조

대만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대미 회의론자들은 역사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을 근거로 든다. 이들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뉴욕에 있던 대학원생들로, 미국의 혼란스러운 역병 대응과 반아시아적 편견에 환멸을 느꼈다. 또 다른 이들은 실리콘밸리에 연고가 있는 엔지니어들로, 미국이 세계 최첨단 반도체의 90%를 생산하는 대만의 마이크로칩산업에 미국 내 생산을 압박하는 데 불만을 느끼고 있다.

총통 선거에 투표하러 대만에 돌아온 재미 대만인 에이미 추는 "미국이 전쟁에서 대만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확신할 수 없다"며 "미국인들은 대만이 더 많은 무기를 사기를 원한다. 대만의 돈과 반도체를 원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트럼프가 승리하면 미국우선주의 외교정책으로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라이칭더 총통 당선자를 비롯한 대만 정치인들은 이러한 우려에 대해 언급하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그는 총통선거 승리를 확정한 후 우선순위를 밝히는 자리에서 '대만에게 있어 외부 지원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점을 시사했다.

대만 정치인들이 미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로비만 하는 건 아니다. 대만의 2024년 예산안에는 군사비를 국내총생산의 2.5%, 즉 190억달러로 늘린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만 지도자들은 중국의 침공을 막는 데 필요한 드론과 미사일, 기타 비대칭 무기로 국방을 현대화하는 데 더디게 움직이고 있다.

대만 사회에서도 그다지 큰 긴박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만군 자원입대자는 2021년 이후 감소하고 있다. 의무복무 연기는 흔한 일이며, 지역사회 차원의 민방위 훈련은 여전히 드문 편이다.

미국 관료들과 분석가들은 미국에 대한 대만인의 불신에 별다른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미국대사관 역할을 하는 대만 소재 '미국연구소' 로라 로젠버거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대만인의 대미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는 질문에 "이는 대만의 견고한 민주주의를 반영한다"는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하지만 대만의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솔직한 평가, 전략적 모호성에서 전략적 명확성으로의 전환을 갈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대만에 병력과 장비를 배치하고 정보를 교환하며 공동의 계획을 세우고 홍보하는 등 장기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승패가 갈릴 수 있는 대만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판신신 부교수는 "대만이 미국의 국익에 왜 중요한지 자세히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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