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러시아 핵연료 독점 깰 수 있을까

2024-01-24 11:12:50 게재

러 의존도 1/5 넘어 … FT "미정부, 공급망 강화에 투자하지만 관련업계는 신중"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미국은 러시아산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석탄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대체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자력 연료는 다르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 국영 원자력 대기업 '로사톰'과 그 자회사 '테넥스'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 원자력 연료에 의존하는 비중은 1/5이 넘는다.

23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국 공급망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황폐화됐다. 원자력에 대한 갑작스러운 투자 급감으로 원자로에 연료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우라늄 농축과 변환 등 부수적인 서비스를 공급하는 많은 민간기업이 위기를 겪었다 .

미국 핵연료회사인 '센트러스 에너지'의 전 최고경영자 대니얼 포네만은 FT에 "거대한 공급망이 있었지만 후쿠시마 사고로 시장이 완전히 붕괴됐다"고 말했다.

시장 붕괴로 러시아 의존도가 높아졌다. 러시아 테넥스는 최신 원자로에 동력을 공급하는 데 필요한 '고순도저농축 우라늄(HALEU)' 판매를 독점하고 있다.


포네만은 "민감한 이중용도 핵기술 부문을 민영화한 국가는 세계에서 미국이 유일하다"며 "이 때문에 리스크에 노출됐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본격화되면서 전세계 원자력에너지 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원자력 르네상스에 우라늄 가격 급등

우크라이나전쟁은 화석연료 대안으로 원자력 수요가 증가하는 시기와 맞물렸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 등 21개 국가는 2050년까지 원전 용량을 현재 수준의 3배로 늘리기로 했다. 전세계 60기의 원자로가 건설 중이다. 추가로 100기의 원자로가 계획 단계에 있다.

이들 국가는 우라늄 농축 및 변환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42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신규 원자로를 건설하는가 하면 기존 기술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예상되는 소형모듈형원자로(SMR)의 배치를 모색하고 있다. 빌 게이츠 등 민간투자자들은 SMR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우라늄과 핵연료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신규 원전 건설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미국 영국 등 서구 국가들이 기존 원자로의 수명을 속속 연장했다. 이는 우라늄 가격 반등을 불렀다. 우라늄 가격은 2021년 초부터 현재까지 3배 올라 파운드당 106달러에 이른다. 16년 만의 최고치다.

핵연료 공급망은 우라늄광석의 채굴과 제분에서 시작된다. 미국의 우라늄광석 생산량은 1980년대 정점을 찍었다. 일부 미개발 매장지가 남아 있지만, 미국 업계는 해외의 저비용 기업들과 경쟁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현재 미국 원자력발전소는 우라늄의 대부분을 수입하고 있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서 공급량의 거의 절반을 조달한다.

광석을 가스로 전환한 다음 우라늄235 동위원소를 약 5% 수준으로 농축해 핵분열을 일으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도록 하는 화학공정은 훨씬 더 전문화돼 있다. 우라늄농축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구 주요 공급업체는 프랑스 '오라노'와 영국 독일 네덜란드 컨소시엄인 '우렌코' 단 두곳뿐이다. 중국은 자국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농축능력을 구축했다. 러시아는 전세계 상업용 농축능력의 거의 절반을 보유한 우라늄 강국이다.

미국 93개 원자로에서 사용되는 연료의 1/5분 이상이 로사톰 등 러시아 공급업체와의 계약을 통해 공급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의 러시아 의존도는 훨씬 높다. 핀란드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체코에 있는 러시아산 원자로 18기에서 최근까지 러시아산 연료를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워싱턴에 본사를 둔 독립연구기관 '클리어뷰 에너지 파트너스'의 케빈 북은 "호주와 캐나다 등 우라늄 대체 공급원이 있지만 원자력 공급망에서 가장 약한 고리는 농축연료"라고 말했다.

고순도저농축 우라늄(HALEU)은 일반적인 핵연료보다 더 강력해 SMR 원자로에 쓰인다. 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건 러시아 테넥스다. 이로 인해 미국 원자력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겼다. 빌 게이츠가 설립한 SMR 개발기업 '테라파워'는 2022년 12월 와이오밍주에 계획된 345메가와트급 신규 원자로 건설을 연료 제약을 이유로 2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테라파워 CEO 크리스 레베스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테라파워의 공급망에서 유일한 상업용 HALEU 공급원인 테넥스를 떼어내야 했다"고 말했다.

바이든정부는 우라늄 농축 및 변환 공급망을 재건하기 위해 △국내업계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국제적 파트너들을 규합하며 △러시아산 수입을 금지하는 3가지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 원자력담당 차관보인 캐서린 허프는 "이 전략은 미국의 국가안보, 에너지 독립성, 기후목표를 지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SMR 원자로 연료 독점

미국 에너지부는 러시아의 SMR 원자로 연료 독점을 깨기 위해 오하이오주 피케톤에서 센트러스 에너지사가 주도하는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센트러스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가격 폭락으로 2014년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2016년엔 원심분리기 120대의 가동을 중단했다. 현재는 시범 프로젝트만 운영중이다.

지난해 11월 센트러스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뒀다. 16-원심분리기 캐스케이드 시스템을 사용해 우라늄을 정상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농축해 미국에선 처음으로 20㎏의 고순도저농축 우라늄을 생산했다. 회사 측에 따르면 이 우라늄 3큰술만 있으면 미국 일반 소비자가 평생 동안 사용할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SMR을 성공적으로 설계하고 건설하는 반면 미국 기업들은 지금까지 계획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러시아 로사톰은 중국 베트남 헝가리 방글라데시 등 해외에서 30기 이상의 표준 원자로를 건설중이다. 이 기업은 2022년 12월 "향후 10년 해외 수주액이 2000억달러에 달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바이든정부는 지난해 11월 미국 기반 기업들이 원자력 농축 및 전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미의회에 22억달러 예산을 추가로 요청했다. 또 SMR 개발업체들에 수십억달러를 지원키로 약속했다. 이달에는 우라늄 농축 서비스 공급을 위해 관련기업들에 5억달러 지원을 시작했다.

한편 미 하원은 지난달 러시아산 우라늄 제품 수입금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2028년까지 대체공급이 없는 경우 특정국가 제품 수입을 허용하는 면제조항을 포함시켰다. 상원에서도 해당 법안은 초당적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 의회예산처 추산에 따르면 이 법안이 통과되면 미국 원자로 운영업체의 연료비가 13% 인상될 전망이다.

서방국가들 속속 투자 진행하지만…

유럽 기업들도 속속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영국 독일 네덜란드 컨소시엄인 '우렌코'는 농축 능력을 늘리기 위해 미국 뉴멕시코주와 독일 네덜란드 등 3건의 투자를 단행했다. 프랑스 국영기업 '오라노'는 자국 공장 중 1곳의 생산능력을 약 30% 확장하기 위해 17억유로를 투자했다. 2028년 가동될 예정이다.

우렌코와 오라노의 예정된 증산량은 현재 러시아가 미국과 유럽에 판매하는 물량의 약 절반에 해당한다. 러시아의 공급을 완전히 대체하려면 신규 공장을 짓고 새로운 광산을 개발해야 한다. 오라노 등은 대규모 신규 프로젝트에 투자하려면 러시아가 다시 시장에 값싼 제품을 쏟아내지 못하도록 수입쿼터제 등 보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FT는 "이처럼 서방국가 정부들이 러시아 의존도 탈피를 위해 적극 밀어붙이고 있지만 많은 원자력 기업들은 호황과 불황을 반복해온 업계의 역사를 고려할 때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말 SMR 기술을 개발하는 미국 'X-에너지'가 18억달러 규모의 스팩 상장에 실패하면서 시장 심리가 위축됐다. 아이다호에서 미국 최초 SMR을 건설하려던 '뉴스케일파워'도 관련 계획을 취소했다.

미국 우라늄 변환 서비스 제공업체 '컨버딘'도 2017년 미국 유일의 원자력 변환 시설을 폐쇄했다 지난해 가동을 재개했다. 이 기업 크리츨리 CEO는 "향후 투자결정은 고객들의 수요 증가와 연계해야 한다"며 "우리는 투기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 주문과 실제 수요가 발생하면 용량 추가를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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