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화폐의 타락, 더는 안된다

2024-02-02 00:00:00 게재

이학영 경제사회연구원 고문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사람들이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할 때 보이는 특징이 있다. 본질을 호도하거나 에두르는 표현으로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려고 한다. 남을 괴롭히고선 ‘손 좀 봐줬다’고 하는 식이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부터 15년 가까이 대대적인 통화 공급 확대조치를 지속하면서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라고 부른 것도 그런 경우다. ‘무제한 돈 풀기’라고 했으면 알아듣기 쉬웠을 텐데 난해하게 표현한 것은 스스로도 켕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 연준 양적완화로 가계·기업 ‘공짜 돈 중독증’

2001년 3월 일본 중앙은행이 장기간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극약처방’으로 이 정책을 처음 도입했지만 본격 확산시킨 주역은 미국 중앙은행(Fed)이다.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와 베어스턴즈 등 대형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파산하면서 금융시장은 물론 실물부문까지 일대 충격에 빠지자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조치로 꺼내들었다. Fed는 2010년 1분기까지 1년6개월 사이에 ‘제로(0)’ 수준으로의 기준금리 인하와 함께 1조7000억달러(약 2000조원)를 쏟아 붓는 어마어마한 돈 뿌리기에 나섰다.

덕분에 큰 불씨를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로금리에 무제한에 가까운 통화 공급까지 이중적인 금융완화에 맛들인 가계와 기업들의 ‘공짜 돈 중독증’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우파 포퓰리스트’로 불리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당시였던 2019년 Fed가 통화정책을 정상화할 조짐을 보이자 1%p 이상 금리를 더 낮추라며 “마이너스금리를 두려워 말라”고 압박하기까지 했다.

미국이 금융위기를 벗어난 이후에도 2022년 3월까지 초저금리 기조를 장기간 유지하며 ‘이지머니(easy money, 조달비용이 낮은 돈)’ 공급을 지속했던 데는 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14년 가까이 계속 공급된 ‘이지머니’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경제에 큰 후유증을 빚었다. 넘쳐나는 돈이 증권시장과 부동산시장에 흘러든 것은 물론 비트코인 등 자산가치가 실증되지 않은 암호화폐에까지 엄청난 투기가 몰리면서 곳곳에서 거대한 거품이 형성됐다.

경제의 해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양적완화’의 큰 흐름과 부작용을 벗어날 도리는 없었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기준금리가 2020년 5월부터 2021년 8월까지 연 0.5%의 사실상 ‘제로금리’로까지 낮아지면서 자산시장에 온갖 모래성을 쌓았다. 증권 부동산 등 전통적인 시장은 물론 암호화폐시장에서 ‘재미’를 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을 표현한 ‘벼락거지’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최근 태영건설 사태가 상징하는 건설업계 부실위기도 ‘이지머니’가 넘쳐나던 시절 조달금액의 5%만 있으면 손쉽게 조성할 수 있었던 부동산 PF(프로젝트금융) 거품이 터진 결과다.

‘이지머니’의 가장 큰 해악은 돈의 ‘돈값’ 구실을 가로막아 돈이 생산적인 곳으로 가는 대신 투기자산에 몰리게 하고, 그 결과 빚어지는 거품으로 인해 더 큰 리스크와 투기의 악순환을 촉발시킨다는 것이다. 영국 경제신문 파이낸셜타임즈가 지난 1월 11일자 ‘이지머니의 부패시대에 이별을 고하라(Say farewell to the corrupting era of easy money)’는 제목의 칼럼에서 “저금리는 은행에 저축한 사람의 비용으로 돈 빌리는 자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하는 결과를 빚는다”며 “부(富)의 불평등을 악화하고 세상을 부패시키는 초저금리시대가 되풀이돼선 안된다”고 경계한 배경일 것이다.

화폐의 타락 경고한 케인즈 유훈 되새겨야

인위적 저금리는 무엇보다도 돈의 시간가치를 훼손시켜 미래에 대비한 사람들의 저축의욕을 꺾고, 돈을 비생산적인 곳에 몰리게 해 시장경제의 건강한 작동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

“한 사회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수단 가운데 화폐의 타락만큼 교묘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한 경제학자 케인즈의 유훈을 되새겨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