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피해자 손배소 1심 문제 있어”

2024-02-02 00:00:00 게재

서울고법, 대법원 판례 무시 1심 파기환송

일본기업 상대 피해자 손해배상 길 열려

유족들 “대한민국은 아직 해방되지 않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항소심 법원이 대법원 판례를 따르지 않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소송을 걸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한 1심 판결을 파기 환송한데 따른다.

서울고등법원 민사33부(구회근 부장판사)는 1일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18명이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기업 7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1심의 각하 판결을 깨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돌려보냈다. 1심이 본안심리도 하지 않은 채 재판을 끝낸 것은 문제가 있다는 취지로, 피해자들은 다시 1심부터 사실관계를 판단받게 됐다.

파기환송은 주로 대법원에서 하는데 항소심에서 나온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보통 항소법원은 원심을 깨더라도 별도로 판단(파기자판)을 거친다. 2심이 사건을 돌려보낸 건 1심 재판절차에 문제가 있었다고 봤다는 해석이 나온다.

‘전범기업 손해배상 각하’ 2심서는 파기 환송 판결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심 각하 판결을 받았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및 유족들이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선고 기일에서 1심 파기 환송 판결을 받은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류영석 기자

◆2심 이례적 파기환송은 1심 절차문제 때문 = 피해자들은 2015년 5월 이 사건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당시 1심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참가하며 ‘강제징용 관련 최대규모 소송’으로 불렸다. 소송에서 피해자들은 자기의사와 다르게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로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임금마저 제대로 지급받지 않았으며, 극심한 육제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6년 공방 끝에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 국가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를 제기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면서 각하 판결을 내렸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보긴 어려워도, 이를 행사할 수 없다”면서 “법원은 헌법기관으로서 헌법과 국가 그리고 주권자인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위와 같이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각하 이유를 밝혔다.

당시 재판부는 심지어 “징용의 불법성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고, 청구가 받아들여져 일본이 국제재판에 이사건을 가져갈 경우 미국과의 관계 훼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등 국익 손상의 우려가 크다”고 했다.

◆당시 1심 재판장 탄핵 국민청권 30만명 참여= 이 같은 1심 판결은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례와 정면배치 돼 논란이 일었다. 재판장인 김 부장판사를 탄핵해 달라는 국민 청원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와 30만명이 넘는 인원이 동의하기도 했다.

2심 재판부가 이날 1심 파기환송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법조계에서 “청구권을 인정하는 취지일 것”이라는 추론이 나온다. 최근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승소 판결이 연달아 확정되는 등,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는 판례가 이미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날 같은 재판부인 서울고법 민사33부(구회근 부장판사)는 또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 김 모씨와 유족 63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임금청구소송에서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과 마찬가지로 원부 일부 승소 판결했다.

이 소송은 강제징용 피해자 40여명과 유족들이 과거 강제노역을 하고 임금을 받지 못했다며 2013년 제기한 소송이다.

1심은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일부를 제외하고 미쓰비시가 원고들을 자신의 사업장에서 강제노역을 시켰거나 강제징용을 공모했다는 점을 인정하기 부족하다”며 김씨 1명에게만 1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기본적으로 민사소송에서 입증책임은 원고에게 있다. 그러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피해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에 항소심 재판부도 피고측에 피해자들의 근무 자료 등을 확인해서 제출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결국 입증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이날 재판에 참석한 한 유족은 “아버지에게서 군함도에 들어가 3년 동안 고생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며 “그런데도 ‘자료를 가져오라’고만 하는 것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최소한 유족들에게만큼은 아직 대한민국은 해방되지 않았다. 역사를 부정하는 사실을 제대로 잡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서원호 기자 os@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