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임종헌 유죄 “단독범행”

2024-02-06 00:00:00 게재

1심, 양승태 ‘지시 없이’ 사법행정권 사유화 판단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죄 인정, 재판개입은 무죄

‘사법농단’ 의혹의 실무 책임자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1심에서 일부 유죄를 선고받았다. 재판 개입 혐의는 대부분 무죄 판단을 받았지만 사법행정권을 특정 국회의원과 청와대를 위해 남용한 혐의 등은 유죄로 인정됐다. 사법사상 최초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 기소하며 세상을 뒤흔들었던 사법농단 사건은 법원행정 ‘3인자’로 꼽혔던 최종 실무 책임자 임 전 차장에게 일부 책임을 묻는 것으로 일단락될 가능성이 커졌다.

의혹의 최고 책임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이었던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이 최근 1심 무죄 판결을 받은 것과 대비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1부(부장 김현순·조승우·방윤섭)는 5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직무유기, 공무상 비밀누설 등의 혐의로 기소된 임 전 차장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2018년 11월 검찰이 구속 기소한 지 5년 2개월여 만이다.

임 전 차장이 받는 혐의는 상고법원 추진 등 법원 위상 강화 및 이익 도모, 사법행정 관련 대내외 비판 세력 탄압, 부당한 조직 보호, 비자금 조성 등 크게 네 가지였다. 구체적 죄목은 직권남용, 직무유기, 공무상 비밀누설 등 30여개에 달한다.

재판부는 이 중 2015년 10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처분 소송에서 청와대 요청에 따라 고용노동부의 소송 서류를 사실상 대필해 준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임 전 차장에게 적용된 핵심 혐의 중 하나로 꼽힌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청와대 비서관의 부탁을 받고 소송 일반 당사자인 정부에 도움을 주고자 행정처 심의관에게 지시한 것으로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또 2015년 3~8월 홍일표 전 자유한국당 의원의 형사재판 전략을 대신 세워 준 혐의에 대해서도 “국회의원 개인을 위해 법률 자문을 해 준 행위로 직권남용에 해당하고, 법관 윤리강령에도 반한다”며 유죄로 판단했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관련 검토 지시 혐의, 통합진보당 지역구 지방의원에 대한 제소 방안 검토를 지시한 혐의 등도 유죄로 봤다. 각급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 명목의 예산 3억5000만원을 현금화해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도 일부 유죄로 인정됐다. 유죄로 인정된 배임 액수는 각 법원장과 법원행정처에 배정된 3억3320만원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사법행정권을 사유화해 특정 국회의원과 청와대를 지원하는 데 이용했다”면서 “사법부 독립이라는 이념은 유명무실하게 됐고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저해된 데 이어 법원 구성원들에게도 커다란 자괴감을 줬다”고 질타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범죄 행위로 사법부의 다른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이념이 유명무실하게 됐고 국민 신뢰가 저하됐다”며 “사법행정권을 행사하는 법관들이 다시는 피고인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엄중한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지난달 26일 양 전 대법원장 1심 무죄 판결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 등 재판 개입 의혹은 무죄로 판단했다. 임 전 차장의 위안부 손해배상, 국정원 댓글 사건 재판 개입 혐의도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법원 내 비판세력 탄압 혐의(사법부 블랙리스트 작성·실행)도 대부분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수사 초기 언론을 통해 국민 뇌리에 깊이 각인됐던 사법농단이나 재판 거래에 관한 중대한 의혹들은 수많은 검사들이 투입돼 그 결과가 300쪽 넘는 분량의 공소사실로 정리됐지만, 대부분 실체가 사라진 채 ‘심의관에게 부적절한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는 직권남용죄로 남게 됐는데 이것도 대부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유죄로 인정된 범행도 피고인이 단독으로 저지른 범행이거나, 예산 관련 범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임 전 차장을 마지막으로 사법농단에 연루돼 기소된 전현직 판사 14명에 대한 1심 판단은 모두 마무리됐다. 이 중 일부라도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은 임 전 차장을 포함해 3명이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2심에서 벌금 1500만원을,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현재 상고심이 진행 중이다. 앞서 의혹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달 26일 1심에서 전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에 2017년 2월 첫 의혹 제기 후 7년 동안 나라를 뒤흔들었던 사법농단의 실체가 임 전 차장 등 고위 실무자들의 일탈로 사실상 결론 난 셈이 됐다.

검찰은 “판결의 사실 인정과 법리 판단을 면밀하게 검토·분석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