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변화 직시하고 신발끈 묶을 때

2024-03-11 13:00:02 게재

20여년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미국의 스펜서 존슨이 쓴 짧은 우화다. 미로 속 두마리 생쥐와 꼬마 인간 두명이 치즈를 찾는 이야기를 다룬다. 치즈는 성공과 행복을 상징한다. 창고에 쌓였던 치즈가 사라지자 생쥐들은 재빠르게 새로운 치즈를 찾아 나선다. 반면 꼬마 인간들은 당황하며 우왕좌왕한다. 변화에 맞서 과감하게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한다는 것이 이 책이 주는 교훈이다.

지난달 24일 일본 구마모토에서 TSMC의 반도체공장 준공식이 열렸다. 보통 5년이 걸리는 공장 건설을 불과 22개월 만에 끝낸 것이다. 치즈우화에서 상황이 바뀌자 생쥐들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모습과 비슷하다.

변화에 재빠르게 대처해 가는 일본 반도체산업

1980년대 세계를 주름잡던 일본 반도체는 미국의 견제와 시대적 흐름을 오판해 몰락의 길로 들어섰고 우리나라와 대만이 재빠르게 자리를 차지했다. 이번에는 일본이 단단히 벼르는 모습이다. 트럼프 집권과 코로나사태 이후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와 세계화 몰락이 가속화되자 일본의 움직임이 민첩해졌다. 경제안보로 재빨리 무장하는 동시에 반도체 생산시설 확보에 전력을 다한다. 2021년 경제안보상을 신설하고 경제안전보장법 제정을 추진한다.

곧이어 TSMC와 협력해 반도체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대처법도 확연히 달라졌다. 혼자 모든 걸 해결한다는 고집을 버리고 외부에서 자원을 끌어다 모으는 개방형 혁신을 과감하게 추진하고 있다. TSMC 마이크론 글로벌파운드리 등 해외 반도체기업과 협력해 부족한 생산시설을 확충하는 한편, IBM IMEC와 협력해 필요한 기술을 습득해가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치즈우화의 꼬마 인간들처럼 빠른 결단과 행동이 모자라 보인다. 우리나라는 6.25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처럼 커다란 성공 치즈가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것 같지 않다. 세계화의 몰락과 세계경제의 파편화가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를 불리한 상황으로 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중 간 갈등이 깊어지면서 중국으로의 투자와 수출에 따른 이점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또한 중국은 우리나라의 주력산업을 하나하나씩 밀어내고 있을 뿐 아니라 첨단산업 분야 기술자립에 힘을 쏟고 있어 우리 미래 먹거리를 위협하고 있다. 올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는 경우 대미 투자와 교역이 불안정해지면서 우리경제는 또 다른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25년 만에 일본에 뒤지면서 우리경제가 저성장기조에 빠져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제기된다.

현란한 말보다는 발로 뛰는 행동이 필요

대내적으로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고 학생들이 공대를 포기하고 의대로 진로를 바꾸는 현상은 이미 오래 전 얘기가 돼버렸다. 그럼에도 케케묵은 규제는 갓 태어난 신생기업의 목을 조르고 커가는 기업의 투자의지를 꺾어버린다. 2019년 부지가 선정된 용인 하이닉스 공장은 민원과 규제에 묶여 5년째 제대로 공장건설을 하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지원법도 여야의 대립으로 시간을 끌다 경쟁국의 지원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반쪽자리로 결론이 났다.

우화에서 꼬마 인간들은 맘껏 즐겼던 치즈가 사라지자 과도하게 상황분석에 몰입한다. 그러다 상대를 비난하고 치즈가 사라진 창고 주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맴돈다. 지나치게 따지고 분석하고 행동보다 현란한 말만 난무하는 그런 모습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우리는 이미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해야할지 안다. 생쥐들처럼 신발끈을 묶고 새로운 치즈를 찾아 뛰어나가는 행동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의 구마모토 반도체 공장처럼 다른 나라가 먼저 발견해서 먹어버릴지 모른다.

김용래 경희대 학술연구교수 전 특허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