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국제규범 제정자 지위를 위한 싸움

2024-03-26 13:00:02 게재

미중 전략경쟁은 누가 ‘규범 제정자’가 되고 누가 ‘규범 순응자’가 될 것인가의 싸움이다. 2차대전 승전국 미국은 지난 70여년간 국제 정치·경제 규범의 제정을 주도했다. 미국의 영향력은 소련 붕괴 이후에는 공산권을 포함한 전세계로 확대됐지만 서유럽과 일본경제가 성장하고, 중국이 급성장하면서 미국의 규범 제정자 역할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국제 경제 규범은 대부분 미국 주도로 창설된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가 다자주의나 복수주의 방식으로 규정해왔다.

그러나 다자주의는 이미 위기를 겪고 있다. 미국은 만장일치제의 WTO 체제로는 자국 이익을 관철시킬 수 없자 다자간 통상체제인 WTO를 외면했다. WTO 출범의 최대 성과 중 하나인 분쟁해결제도는 2017년부터 미국이 상소기구 심사위원의 임명을 거부하면서 역할이 마비됐다.

다자간 국제 경제 규범 제정에서 빠지는 미국

각국 외국인직접투자(FDI)제도를 투명하게 만들어 투자를 촉진하자는 ‘투자원활화’도 한중일과 유럽연합(EU) 등 많은 나라가 찬성하는 가운데 미국은 협정문에 시장 접근, 투자자 보호, 투자가-국가간 분쟁해결제도 등이 포함돼 있지 않다고 반대한다. 미국의 국제전략연구소는 트럼프정부가 중국산 수입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고, 미국 우선주의, 보호무역주의를 펼치자 이는 WTO 설립 정신의 위배라고 우려하면서 전후 미국이 설계해온 개방과 자유화의 다자간 통상체제의 ‘규범 파괴자’에 가깝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미국 부재 속에 국제 규범이 확산되기도 한다. EU는 농식품·음료 등에서 생산지를 상표로 인정하는 ‘지리적표시제’에서 국제 규범을 제시하고 통상 협정을 통해 확산시키고 있다. 2018년 EU와 일본은 경제동반자협정 체결에서 합의했는데 이는 유럽의 생산지 지명을 상표로 사용하는 미국 등 제3국 제품은 유럽과 일본에서 판매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분야에서도 개인 정보의 자유로운 국경 이전이 합의됐는데 이는 미국이 참가를 철회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현재 CPTPP)에서 요구했던 핵심 사항 중 하나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설립 이후 성과가 적지 않았지만 지배구조가 지나치게 미국 등 선진국 중심이어서 개도국들의 불신이 크고, 오히려 개혁 대상이 됐다(장동식·김영일, 2008). 이는 1980년대 중남미, 1990년대 후반 한국·동남아시아·러시아 등이 구제금융을 받는 댓가로 겪은 혹독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주권 침해가 있었고, 전기·가스·수도·통신·금융 등 자국 핵심기업의 지분을 선진 채권국에 넘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규범 제정자 추구

중국은 글로벌 금융 위기 때 미국이 헬리콥터 머니를 살포하자 미국의 기축통화 특권을 비판했다. 이즈음부터 위안화 국제화, IMF와 세계은행(World Bank)을 보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일대일로, 자주적 기술 개발을 위한 자주창신(自主創新) 등을 추진했다. 이 정책들을 주도하면서 규범 제정자 힘을 추구할 것이다. 예를 들어 2018년 선전과 시안에 일대일로의 국제 분쟁 처리 법정을 세웠는데 선전은 해상, 시안은 육로에 관한 국제분쟁을 처리한다. 이는 중국이 홍콩 런던 뉴욕 등에 있는 국제중재센터를 활용하지 않고 새로운 국제규범을 쓰겠다는 의미이다.

당장 중국은 미국이 만들어 놓은 기존 국제 경제 규범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중국은 WTO 체제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고 아직도 높은 대미 수출 의존도와 위안화의 낮은 국제화 수준, 그리고 선진 경제대국과의 협력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기존 국제 경제 규범은 미국과 중국에 의해 지속 파괴되거나 회피될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돌아오면 가속화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규범 제정자 역할을 하지 못하는 쪽은 규범 수용자가 될 것이다.

이영선 코트라 아카데미 연구위원 경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