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면기 칼럼

‘강동 6주의 지정학’과 고려 왕관의 무게

2024-03-28 13:00:00 게재

32부작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3월 초 막을 내렸다. 고려 현종 시기 거란(요나라)의 거칠고 집요한 침략을 격퇴하는 고려의 분투를 현장감 있게 그렸다는 평가가 따른다. 사실왜곡 등 뒷말이 없지 않았지만 고려사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환기하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강동 6주 확보’라는 신의 한수가 고려가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풍운을 좌우할 수 있게 된 전략적 전환점이었다는 점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의 말대로 이 지정학적 거점이 없었다면 고려는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거란의 연이은 침략에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당시 고려와 거란의 충돌은 906년 거대제국 당(唐)의 붕괴 이후 몰아닥친 지정학적 격동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916년 거란족이 요(遼)를 건국한 후 926년 발해 멸망, 936년 고려의 재통일 등 10년 단위로 벌어진 대사건이 보여주는 대로다. 960년 송(宋)이 정통 한족왕조를 복구하면서 반세기 넘어 계속된 5대10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했다. 무장들의 할거가 잦아들면서 동아시아에는 고려와 거란의 요, 한족의 송 삼국이 정립(鼎立)하는 질서가 만들어졌다.

993년 거란은 다시 송과 패권을 겨루기에 앞서 고려를 침공했다. 1019년까지 이어지는 ‘긴 전쟁’의 서막이었다. 거란의 침략을 맞아 상대적 약자 고려에서는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항복하자는 의견이 대두했다. 이때 서 희(徐熙)가 국왕 성종과 대신들의 주장을 제지하고 적장 소손녕과의 협상에 나섰다.

서 희가 거란에게 입조(入朝)라는 카드를 주고 여진이 점거하고 있던 청천강 이북 280여리 영토를 확보했던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한국외교의 명장면이다. 압록강 너머까지 올라가려는 꿈은 접어두었지만 그는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등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국세를 늘리면서 대륙세력의 침략을 막을 강고한 진지를 마련한 것이다.

약소국에는 전략이 없다는 미신 깨야

고려왕조는 현재적 맥락에서 두가지 뚜렷한 역사적 위상을 갖는다. 하나는 이전 역사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한반도가 단일한 정치공동체를 지향해 나가는 운동력을 보존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주적이고 실용적인 북방정책의 역사적 원형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고려가 이같은 한국 역사지정학의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강동 6주가 가져온 역사의 선물같은 것이었다.

국제정치학자들은 습관적으로 소위 ‘대전략(grand strategy)’은 강대국의 전유물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곧 약소국은 전략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약자가 강대국 전략에 추종해서 가능성의 영역을 버리면 역사적 기회를 잃거나 국익을 해칠 위험을 키우게 된다.

고려가 1004년 ‘전연(澶淵)의 맹’을 통해 송을 굴복시킨 당대 최강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고구려 계승자라는 역사적 자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외왕내제(外王內帝)’, 즉 외교적으로는 왕이라 하겠지만 안으로는 황제국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겠다는 기맥 역시 그런 역사적 자부심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개방적 실용적 리더십으로 국가를 이끈 성종과 현종이라는 현군이 있었다. 성종은 비등하는 할지론을 누르고 서 희의 전략을 뒷받침했고, 현종은 거란의 강동 6주 반환요구, 항복론을 일축하고 강감찬 양 규 등과 함께 전쟁을 지휘하면서 고려 왕관의 무게를 견뎌냈다. 국왕은 유능한 전략가를 기용하고 충신들은 국왕의 결단에 호응했다. 고려 혼자의 힘으로 거란을 물리치고 송과 거란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크로체(B. Croce)의 말처럼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이명박·박근혜정부가 서 희 외교와 고려거란전쟁의 맥락을 현재적 맥락에서 통찰하고 있었다면 한반도 평화의 전략공간으로 구상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그토록 경망하게 폐쇄하는 패착을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역사에 어두워 미래를 버리는 뼈아픈 경험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정치권의 역사투항주의를 경계한다

4월 10일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다시 역사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야당은 반복되는 여당발 뉴라이트 역사인식과 부적절한 언행을 비판하고, 여당은 중국을 공연히 자극하지 말라는 야당의 주장을 사대주의로 매도한다. 정치권이 이같은 역사투항주의적 언사로 국민적 자긍심에 상처를 내고, 역사를 읽는 시야를 흐리고, 국가전략의 토대를 허무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지금은 송의 중화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거란의 군사주의를 극복하며 국가이익에 집중했던 고려의 전략적 감각을 회복할 때다. 진영론에 갇힌 소모적 역사논쟁을 뒤로 물리고 잊혀진 천년 영웅 양 규의 동상을 서울 한복판에 세울 결기를 모을 때다. 위기의 시대, 고려거란전쟁의 장대한 서사에 공감한 국민들이 크게 환영할 일 아니겠는가!

홍면기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