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위원회 풍경

과업 달성을 위해 밤늦게까지 일했는데 ‘징계해고’

2024-04-19 13:00:01 게재

L씨는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는 벤처기업 B사에서 인공지능개발 업무를 수행했다. B사는 고객사가 요구하는 과업을 일정에 맞춰 완수하는 일을 주로 했다. 직원 수가 10명 남짓 되다 보니 직원들은 항상 시간에 쫓겨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B사는 고객사로부터 8개월짜리 신규 프로젝트를 수주받아 개발에 착수했는데 인공지능(AI) 개발 경험이 있는 L씨가 참여하게 됐다. 신규 프로젝트는 통상 4명 정도를 팀으로 구성해 개발해야 하나 B사 인력 사정이 여의치 않아 L씨를 포함해 K사원과 함께 2명만이 개발에 참여했다.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회사는 “근무태만”

신규 프로젝트에 착수한 L씨와 K사원은 과업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월별 스케줄에 맞춰 개발을 진행했다. 평소 소프트웨어 개발이 몸에 배어 있는 L씨는 업무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늦게까지 야근하는 일이 잦았다.

동료 직원들을 의식하지 않고 반바지 착용 등 일하기에 편한 옷을 주로 입었다. 또한 L씨는 업무 효율성을 높인다는 생각에 사비로 자신의 체형에 맞는 책상과 의자를 교체하기도 했다. L씨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 회사가 요구하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므로 문제가 될 소지가 없고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는 당연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B사는 이러한 L씨의 행동에 주의를 줬다. ‘우리 회사는 정시출근, 정시퇴근을 원칙으로 하는 회사이므로 당일 해야 할 일은 근무시간 내에 끝낼 것’, ‘불가피하게 야근하게 되면 반드시 사전 승인을 받고 야근하되, 다음날 출근 시간은 반드시 지킬 것’, ‘회사 소유 기물에 문제가 있으면 보고 체계를 통해 조치할 것’ 등 여러 가지 사항을 훈시했다.

근무 불성실, 근로자의 전적인 책임 아니다

이후 프로젝트 개발이 진행되던 도중에 B사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인해 함께 개발에 참여한 K사원은 다른 업무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신규 프로젝트 개발은 L씨만 단독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전담하게 된 L씨는 야근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았고 아침에 지각하는 일도 계속 이어졌다. 또한 L씨는 코로나19에 확진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방역지침을 위반하고 회사에 출근한 적도 있었다. L씨가 전담한 신규 프로젝트는 예정된 일정보다 1달 정도를 넘겨 고객사에 제출됐다.

신규 프로젝트 개발이 끝난 후 B사는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음에도 L씨의 태도가 개선되지 않은 점, 프로젝트 과업에 차질이 발생한 점 등을 들어 L씨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징계사유는 ‘근무태도 불성실(임의 야근, 잦은 지각)’ ‘업무수행 불이행’ ‘방역지침 위반 및 회사 기물 파손‘ 등이었다.

징계위원회에 참석한 L씨는 “회사가 부여한 프로젝트의 과업 달성을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B사는 징계사유가 모두 사실로 인정된다는 이유로 L씨를 징계해고했다.

노동위원회는 L씨의 행동이 표면적으로는 잘못이 있다고 보일 수 있으나 L씨가 회사의 질서를 저해할 목적이 아닌 프로젝트 과업 달성을 위해 불가피하게 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징계사유가 해고에 이를 만큼 중하다고 보지 않았다.

화해, 노사 상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솔루션

노동위는 L씨와 B사를 만나 이번 사건에 서로의 책임이 있음을 설명하고 그동안 쌓였던 감정도 풀 수 있도록 화해를 주선했다. 노동위가 주선한 자리에서 L씨와 B사는 그간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면서 감정이 풀리게 됐고 최종적으로 합의하고 갈등을 마무리했다.

직장분쟁 해결을 위해 근로자와 사용자는 노동위를 찾고 있다. 노동위로부터 판정을 받더라도 이에 불복해 소송까지 가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판정이나 소송을 위해 갈등 당사자가 지불해야 하는 시간과 비용이 적지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더하여 결과에 대해 당사자가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지난해 노동위에서 처리한 사건 중에서 화해를 통해 분쟁이 해결된 사건의 평균 처리 일수는 38.6일이었다. 이는 판정에 걸리는 평균 처리일수인 88.6일에 비해 약 1/2에 불과하고 법원의 행정소송(1심) 평균 처리 기간인 401일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차이다.

분쟁 해결을 위해 오랜 시간을 소비과업 달성을 위해 밤늦게까지 일했는데 ‘징계해고’하는 것보다는 당사자가 분쟁을 조기에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재상 중앙노동위원회 심판1과 사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