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전쟁술을 변화시킨 전투기 조종사

2024-04-23 13:00:01 게재

전쟁술 연구에 평생을 바친 미 예비역 공군대령 중 존 보이드라는 사람이 있었다. 보이드는 일찍이 ‘우다(OODA)이론’을 개발해 기동전 이론의 진수를 정립했다. 윌리엄 린드가 기동전 편람에서 그의 이론을 소개했는데 보이드는 에너지 기동이론을 1966년에 정립해 미 공군의 전투기 설계 개념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이단아였다.

보이드는 전투기 설계 시 전투임무 수행에 필요한 필수기능을 제외하고 전투기를 가볍게 만들어 위치 변환을 자유자재로 해야 한다는 ‘전환이론’을 주장했다. 보이드는 영향력있는 세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76년 ‘파괴와 창조’를 선보였고 ‘전쟁의 형태(the Patterns of Conflict)’는 몇차례 수정을 거쳐 1995년 최종판을 발간했다. 1987년 ‘지휘통제를 위한 구조와 설계’를 발표했다.

그는 미 해군의 F15와 미 육군의 F16의 개발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보이드는 미 국방부 체계분석단에서 전투기 마피아라는 그룹을 결성해 F18도 개발했다. 그리고 A10공대지 항공기 선더볼트를 개발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업적을 남긴 군사천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군과 펜타곤의 출세주의자와 관료주의자들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고 결국 장군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1975년 8월 31일 대령으로 전역했다. 이후 동료 톰 크리스티의 추천으로 미 국방성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지만 군사개혁을 주장하다 펜타곤에서도 이단아로 낙인찍혔다.

비즈니스 모델에도 적용된 보이드 이론

보이드가 주장한 우다루프(OODA LOOP)는 일명 ‘보이드 싸이클’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관측하고(Observe)-방향을 잡고(Orient)-결심하고(Decide)-행동하라(Act)로 이어지는 의사결정순환모델이다. 그는 상호관측이 되는 교전 당사자의 상대적인 동태 파악이 중요함을 간파했다. OODA 루프를 빠르게 처리하면 상대적으로 느린 적의 의사결정은 대응 행동에 실패하고 이것이 누적되면 템포의 적용이 불가해 상대방이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보이드는 1952년 미 공군 넬리스 비행기지에서 F86 조종훈련을 받고 6.25전쟁 말기에 한국전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성능이 우수했던 미그(MIG)15를 F86이 10대 1의 비율로 격추하자 의문을 품고 F86보다 우수한 성능의 미그15가 왜 공중전에서 F86에게 패했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F86의 조종석이 전시창인데 반해 미그15의 조종석은 반시창이라는 사실과 출력을 조절하는 ‘스로틀’ 레버가 기계식 대비 유압식이라는 차이가 관측과 연속 동작에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음을 간파한 후 이론을 정립하였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그의 이론은 일반기업에서도 테스크포스(TF)를 편성해 상대방보다 한발 앞서면 후발 기업의 제품에 대해 상대적인 우위를 달성할 수 있다는 원리로 발전시켜 갈채를 받았다. 보이드 이론은 비즈니스, 정치와 소송 등에 적용했다. 지금도 많은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특별과업을 수행할 경우에는 TF를 편성해 업무를 수행한다.

그의 이론과 사상을 미군에서 제일 먼저 받아들이고 교리로 채택한 조직은 미 해병대였다. 보이드 이론의 가치를 인정한 장교는 미 해병대 마이클 와일리였고 의기투합한 두 사람의 노력은 미 해병대 변화의 토대이자 자극제가 되었다. 보이드의 이론은 해병대 교범에 반영되어 해병대를 싸워 이기는 군대로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개인보다 국가를 생각한 애국자

군사혁신의 대명사로서 치열하게 살았던 그가 가족에게 남긴 유산은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는 현실과 타협해 많은 부를 쌓을 수도 있었지만 개인보다 국가를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의 공적을 뒤늦게 인정한 미 국방당국은 그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미 공군은 1999년 9월 17일 넬리스 공군기지에 보이드 홀을 헌정했다.

레이건행정부의 국방예산이 미국의 재정적 재앙이 될 것이라고 폭로한 펜타곤의 이단아 존 보이드가 사망했을 때 해병대는 조문 장교를 장례식에 보냈고 미 해병대사령관은 “걸프전 당시 존 보이드가 미국 승리의 설계자였다”고 헌정사를 했다. 그는 살아있을 때 보다 서거 후 더 빛나는 전쟁술 연구자였다.

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소장 국민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