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면기 칼럼

외교는 역사의 무게를 지고 진화하는 생물

2024-04-25 13:00:01 게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만해협과 남중국해 등지에서 미중경쟁이 가열되면서 한반도도 그 불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비관적 시나리오가 배경에 깔려있다. 중국을 제압하는 데 사활을 걸다시피한 미국은 한국이 일본과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며 대중전선의 선봉에 설 것을 공공연하게,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한미동맹의 성격이나 주한미군의 역할도 이런 방향으로 초점이 옮겨졌음은 물론이다. 중국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지난 18일 중국 관영 글로벌 타임즈가 “한국이 결국 미국에 버림받을 것”이라는 여론조사를 흘리며 한국의 ‘자주적 외교’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유쾌한 조짐이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반도에서의 국제전쟁은 대부분 당대의 패권전쟁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가 북방 숙적 흉노와의 쟁패에 앞서 고조선을 ‘흉노의 왼팔’로 지목하고 침략한 것, 거란과 청이 송과 명의 잠재적 동맹을 제거하기 위해 고려와 조선을 침략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임진왜란, 6.25전쟁처럼 ‘한반도에서’ 경쟁국을 저지하려 했던 제국의 책략도 비슷한 맥락이다. 또 다른 유형은 한반도 내부의 분열이나 혼란이 외세를 불러들이고 결국 패권전쟁으로 비화한 경우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자력으로 수습하지 못하고 청에 구원을 요청하다 청일전쟁을 불러들였던 역사가 잘 보여주는 바다. 신라가 당과 동맹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것도 유사한 양상이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 외세를 끌어들이기는 했어도 신라 자력으로 당의 한반도 병탄 기도를 분쇄하고 통일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전쟁을 피한 광해, 전화를 부른 인조

미중 패권전쟁의 그림자가 한반도를 덮쳐오고 있다.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질서변환기에 우리가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어떻게 전쟁의 불똥을 막을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찾으려면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국제전쟁을 치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상대국의 내부 정치투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한중 양국이 평화를 유지하는 기본조건이다. ‘천조예치체제’의 관점에서 고대 한중간의 전쟁을 검토한 재미 중국인 학자 황즈리엔(黃枝連)의 지적이다. 중국은 한반도를 흡수하기보다 자주독립적 실체로 인정하고, 한국도 외부세력과 연대해 중국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평화의 길이라는 논리이다. 한중간의 전쟁사에서 그가 또 하나 강조한 것은 한반도가 스스로 내부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형식을 찾아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위기에 처한 한반도 정치세력이 ‘구원’을 요청해 중국이 조정자 혹은 해결사로 나서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긴 시차가 있기는 해도 한반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준칙으로 원용하는 데 손색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집권세력이 감정적 이념외교에 휩싸여 이런 교훈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힘에 의한 대만해협 현상변경 반대한다”는,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대통령 발언이나 외세 개입의 틈을 넓혀주고 있는 대북 적대노선은 모두 상식과 역사의 경험칙에 반하는 것들이다.

남북이 갈등하면 한반도의 원심력이 커지고, 남북한 협력이 미국이나 중국의 압박을 완충할 수 있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통일부는 시대역행적 ‘평화’ 지우기에 여념이 없고, “외교는 역사의 무게를 지고 진화하는 생물”이라고 하던 정재호 주중대사는 역사의 무게를 지는 대신 주재국과의 불통 논란 표적이 되고 있다. 전쟁을 피한 광해와 전쟁을 부른 인조의 차이가 말해주듯 전환기 국가지도자의 식견과 용기는 국가의 명운을 좌우한다. 임진왜란의 역사성에 주목했던 일본의 반전지식인 오다 마코토(小田 實)는 400년 전의 전쟁이 근대일본의 한반도 강점과 강제동원, 6.25전쟁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고 단언한다. 대통령은 ‘과거사는 이제 그만’이라고 손사래를 치기 전에 일본 외교에서 변주되어온 이런 논리를 읽어내고 고민해야 한다. 미국이나 일본의 시각에서 중국 읽기를 멈추고, 그들이 유포하는 지식정보의 책략적 의도를 감별해 내는 지성을 갖춰야 한다. 4.10총선이 여당의 참패로 끝난 후 대통령은 16일 국무회의에서 국정방향은 옳았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심각한 민심 오독이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총선 결과가 민생실패뿐 아니라 친미일, 반중반북의 이념외교, 특히 퇴행적 친일 행보에 대한 심판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극우적 반공외교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안보위기를 해소할 수도 없고 패권전쟁의 위험에서 비껴나 있을 수도 없다.

총선민의, 무능외교에 대한 준엄한 심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저항적 반외세적 맥락보다는 우리가 역사에서 미래전략의 철학과 방법론을 찾아가야 한다고 새길 때 더욱 값진 의미를 갖는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이념외교를 철회하고, 격동기를 헤쳐갈 ‘우리의’ 지식체계 집적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지식독립이 없으면 긴 호흡의 실용적 국가전략 수립도 기대하기 어렵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