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한국인 최초로 터키 공인중개사 자격증 땄어요."

2013-11-18 10:45:43 게재

이스탄불 한인부동산-센트럴민박 정주기·김경희 사장 부부

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오십이면 지천명(知天命). 쉰 살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안다는 공자말씀이다. 쉰 살이 넘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경륜과 지혜를 갖추고 세상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의 50대는 사회에서 우수수 밀려나는 나이다. 오죽하면 오륙도, 즉 56세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도둑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을까.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세상에서 50대는 딱 인생의 절반을 산 나이일뿐. 한창 일을 해야 할 팔팔한 나이에 퇴물 취급을 받기 시작하는 것이다. 직장에서 밀려난 뒤 스스로 무기력해지는 50대들이 얼마나 많은가.

 

터키 이스탄불에서 부동산 사업과 게스트하우스, 무역업을 하는 정주기(58)-김경희(57) 부부는 해외무대에서 50대의 무기력을 훌훌 떨쳐버린 사람들이다. 정 사장은 터키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정 사장 부부는 50대 중반이던 2011년 11월 터키로 건너와 먼저 '이스탄불 센트럴 민박'을 차렸다. 남편은 터키 공인 중개사 시험에 매달린 끝에 이듬해 8월 자격증을 따냈다. 그리고는 터키 상호로 '외주규르 엠락(자유 부동산)', 우리말로는 '이스탄불 한인 부동산'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활발하게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다. 억척스런 대한민국 아줌마인 김 여사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한국인들을 상대로 한 관광 가이드까지 하고 있다. 정 사장 부부는 터키로 들어온 지 2년 만에 부동산과 게스트하우스, 가이드 일 등 세 가지 사업을 모두 안정궤도에 올려놓았다. 최근에는 터키의 광물자원을 한국으로 수출하는 무역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사진:오스만투르크의 정복자 메흐메드 2세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하기 위해 세운 루멜리 요새에서 김경희 여사가 한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하고 있다.>

정 사장 부부의 부동산 중개 사무실과 게스트하우스는 이스탄불의 중심부인 탁심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서울로 치자면 신촌 정도에 해당하는 곳이다. 시실리 메지디예쿄이의 큰길에서 언덕 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이을마즈2 아파트라는 8층 건물 있다. 정 사장은 그곳의 2개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1층에 있는 방 3개 중 가장 큰 방 한 개는 부동산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1층 부동산 사무실에서 정 사장과 마주 앉았다.
 


<사진:정주기 사장은 앞으로 20~30년간 터키의 부동산 호황국면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사진은 정 사장의 부동산 사무실 인근 빌딩 건설 현장 모습.>

생각할수록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터키 공인중개사 시험에 도전할 생각을 했을까. 정 사장은 그런 일에 도전을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걸림돌을 안고 있었다. 우선 50대라는 나이장벽과 터키어라는 생소한 언어장벽, 그리고 최근 나빠진 건강장벽 등은 어느 것 하나 만만하게 볼 만한 걸림돌이 아니다. 직장에서 밀려난 뒤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숱한 50대 들을 부끄럽게 하는 의지요 용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전혀 접해보지도 않은 외국어로 봐야 하는 국가 자격증 시험에 도전할 엄두를 낸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 아닌가.

"저는 새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에 도전하는 것 자체에 희열을 느낍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 희열을 느끼고는 하지요. 아직까지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짜릿한 일입니까. 자꾸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기 위해 저를 자꾸 자제를 시킬 정도예요. 무슨 미지의 세계에 도전을 할 때 너무 두려움 없이 일을 벌이니까요. 터키 부동산 공인중개사 시험도 저에게는 재미있는 도전 같은 거였습니다. 처음 이스탄불로 왔을 때 민박집 자리를 얻기 위해 여기 저기 중개업소를 돌아다닐 때였어요. 피부로 확 느낄 정도로 부동산 시장이 활황이더라고요. 저는 장사꾼 특유의 후각 같은 게 있습니다. 무조건 여기서 부동산 관련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뜻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있거든요. 2월부터 부동산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학원을 다녀야 공인중개사 시험자격을 부여하거든요."

"터키어를 좀 할 줄 아셨나요. 터키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학원 강의를 들으셨나요."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터키어를 공부한 적이 없어요. 처음 터키에 오자마자 개인교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공인중개사 학원을 갈 때도 터키어 선생님과 함께 갔습니다. 아비딘 이란 친구였는데 마침 그 친구도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가 학원비를 대 주었습니다. 학원 강의를 듣고 나서 이해를 못하는 게 있으면 그 친구에게 물으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나의 특이한 재주라고 해야 할까요. 말하는 능력과는 별개로 문자 독해능력에 대한 남다른 능력이 있어요. 옛말에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이라고 했잖습니까. 아무리 어려운 글도 백번 읽다보면 뜻을 깨우치게 돼 있어요. 수업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강의를 듣고, 그 다음에 교재를 알든 모르든 50번, 100번씩 읽고 또 읽었어요. 모르는 단어 나오면 사전과 씨름도 했지요. 부동산 용어들이 한정 돼 있어요. 그래도 모르는 게 있으면 아비딘을 만나서 또 물어보고 그랬답니다. 2012년 8월 시험에서 단 한 번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시험문제가 100개 인데 50점 이상이면 합격인데, 57점으로 간신히 붙었어요. 그해 9월 달에 사업자 등록을 정식으로 하고, 10월에는 아비딘과 함께 메지디예쿄이에 부동산 중개 사무소를 열었습니다.
 


<사진:보스포루스 해협을 연결하는 두 개의 다리 중 하나인 '제2의 보스포루스 대교'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고 있다. 1988년에 완성된 이 다리는 '파티하 술탄 메흐메드교'라도 불린다.>

2013년 1월 중순에 드디어 첫 계약을 성사시켰어요. 이스탄불에 들어오는 한국기업 주재원의 월세 집 계약 건 이었어요. 첫 중개 수임료로 2000리라(140만원)를 받았지요. 그 이후로는 한 달 서너 건씩 꾸준히 계약을 따내고 있습니다. 처음에 너무 분수에 맞지 않게 크게 냈던 사무실도 지난 4월 정리하고 이곳 게스트하우스로 사무실을 옮겼어요."

새벽 4시 반쯤 집을 나서는 정 사장 부부를 따라 나섰다. 도로를 꽉 메웠던 그 많던 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뻥 뚫린 새벽길을 씽씽 달린다. 20여분 정도 갔을까. 차에서 내리니 바다 비린내가 훅 끼친다. 고깃배들이 20여 척 몰려 있는 작은 항구 부둣가에 불빛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왁자하게 새벽공기를 흔든다. 김경희 여사가 날렵한 걸음을 어판장 쪽으로 옮기며 설명을 해주었다.
 


<사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터키 부동산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한 정주기 이스탄불 한인 부동산 사장이 이스탄불 예니체프 수산물도매시장에서 부인 김경희 여사와 함께 새벽시장을 보고 있다. 김 여사는 이스탄불 센트럴 민박집과 관광 가이드도 하고 있는 억척 아줌마다. >

"예니카프 수산물도매시장입니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수산물 시장이에요. 이곳이 이스탄불에서 생선 값이 가장 싸고, 싱싱하고, 가짓수도 제일 많은 곳입니다."

어시장만큼 활력이 넘치는 곳이 또 어디 있으랴. 생선들을 나르는 상인들은 종종걸음으로 뛰고 막 배에서 올라온 활어들은 파닥파닥 튄다. 활력을 따지자면 김 여사도 만만치 않다. 어판장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며 직접 생선을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를 맡아보고, 눈으로 확인하면서 좋은 물건을 고른다. 마침내 문어 10㎏짜리 한 상자를 사서는 번쩍 들고 차로 향한다. 건강이 좋지 않은 남편에게 무거운 짐을 맡기지 않으려는 배려다.

"동네 마켓에서 이 정도 물건을 사려면 350~450리라는 줘야해요. 이곳에선 100리라 밖에 안 하거든요. 훨씬 싱싱하기도 하고요. 터키는 지중해와 흑해 등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지만 생각보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이 아닙니다. 생선 종류도 많지 않아요. 특히 문어와 오징어, 새우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해물은 그리 많이 나오지를 않아요. 좋은 물건은 눈에 뛰는 대로 빨리 사야 합니다."

김 여사가 몹시 서두른다. 빨리 돌아가야 게스트하우스 손님들 아침밥을 챙겨 줄 수 있기 때문. 십여 명 안팎의 손님에다가 식구들 밥까지 매끼를 해대는 일이 어디 보통일인가. 대한민국 아줌마의 억척이 아니면 해 낼 수 없는 일이 바로 게스트하우스다. 방금 새벽 수산물도매시장에서 사온 싱싱한 문어 탕이 아침상에 올라온다. 우리나라 바다에서 잡히는 문어만 맛있는 줄 알았는데, 지중해인지 흑해인지 마르마라인지 터키 앞바다에서 잡힌 문어도 쫄깃쫄깃 맛있다. 아침상을 물리고 정 사장 부부와 차 한 잔을 함께 했다. 50대 중반을 넘긴 부부들이 터키로 삶의 무대를 옮기게 된 사연을 들었다.
 


<사진:이스탄불의 한 음식점에서 터키의 구이음식인 케밥을 요리하고 있다.>

<정 사장>: "사실은 제가 터키로 오기 전에 영국 런던에서 민박을 하고 있었어요. 2006년 2월부터 2011년 8월까지 5년 반 동안 런던 워털루 역 부근에서 '1zone 민박'이란 집을 했습니다. 한꺼번에 20명 정도를 받을 수 있는 규모였어요. 런던 시내를 돌아보려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집이었지요. 워털루 역이 유로스타 시발역이기도 했습니다. 둘째 아들 현웅이가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 했어요. 아들 학업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민박을 시작한 겁니다."

<김 여사>: "저는 서울 쌍문동에서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막내딸 어진이를 키웠어요.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기엔 민박집이 너무 어수선했거든요. 남편이 민박집을 하면서 술을 많이 먹었어요. 원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자연스럽게 여행객들과 한잔 두잔 어울리게 된 거지요. 그러다보니 건강을 많이 해쳤습니다. 간도 나빠지고, 당뇨 혈당 수치도 높게 나왔습니다. 식도에 용종까지 생겼더라고요. 우선 몸을 추스르기 위해 런던 민박집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석 달 동안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쉬었습니다. 저랑 등산도 다니고 기원에 나가 바둑도 두면서 소일했지요. 그런데 우리 신랑은 뭔가를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양반이에요. 결국 일을 벌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정 사장>: "언제까지 마냥 놀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몇 달 쉬니까 몸이 많이 회복이 됐지요. 식구들 먹여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지요. 이 궁리 저 궁리를 해 봤는데 한국에선 할 게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사오십 대는 물론 이삼십 대 무직자들이 우글우글 일거리를 찾고 있는 한국 땅 아닙니까. 저까지 거기서 뭘 해보겠다고 두리번거릴 수가 없었어요. 다시 해외무대로 눈을 돌렸습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새로운 삶의 무대를 찾기 시작했지요. 참 가슴 설레고 두근거리는 순간이지요. 여러 가지를 생각한 끝에 후보지로 좁혀진 곳이 터키 이스탄불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 세 곳이었어요. 케이프타운은 영어 사용지역이라 좋기는 한데 치안문제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바르셀로나는 워낙 유명한 관광지지요. 관광뿐 아니라 FC바르셀로나 축구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 그곳을 찾는 한국 팬들이 늘고 있어요. 영국에서 민박을 할 때 우리 집에 묵었던 손님 한 분이 마침 바르셀로나에 살고 계셨어요. 그 분에게 상황을 알아봤더니 대뜸 오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바르셀로나의 한국인 민박집들은 이미 포화상태라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삶의 무대로 최종 낙착된 곳이 바로 이스탄불입니다.

이곳은 일단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앞으로의 비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게다가 이스탄불이라는 도시 자체의 매력에 끌렸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나서 사람이 살기에 괜찮은 도시잖아요. 제가 추운 걸 싫어합니다. 여기는 지중해성 기후라 겨울에도 따뜻해요.

우선 이스탄불에서 민박집을 열기로 했습니다. 런던에서 해 본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2011년 11월 9일 이스탄불로 왔어요. 탁심과 시실리 사이에 오스만 베이라는 지역에 있는 민박집에서 한 달 동안 생활하면서 집을 얻으려 다녔다. 그때 구한 게 바로 이 입입니다. 민박집 손님 받을 준비를 다 마쳐 놓고 아내를 불러 들였습니다."

<김 여사>: "처음엔 손님이 없었어요. 1년 가까이 파리만 날렸답니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오는 손님이었지만 정성으로 모셨어요. 아침만 주는 다른 호텔이나 민박집과는 달리 아침과 저녁 두 끼를 한식으로 제공했습니다. 민박집의 단점인 이부자리도 깔끔한 것으로 준비하고, 청소도 깔끔히 했지요. 그랬더니 어느 순간부터 방이 꽉꽉 차기 시작했어요. 입소문이 돌기 시작한 겁니다. 런던에서 우리 민박에 들렀던 손님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 덕도 조금 봤어요. 런던의 1존 민박 때 사용하던 사이트 주소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거든요. 이곳에 온 지 불과 2년도 안돼서 자리를 잡았어요. 게스트하우스 경험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한국의 50대 만큼 세계적 경쟁력을 지닌 중년 그룹이 있을까. 대한민국 50대는 우리 경제를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린 주역들이다. 세계 최고 품질의 휴대전화와 가전제품, 자동차, 반도체 등을 만들어 낸 저력의 주인공들이 바로 지금의 50대 들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기치아래 지구촌 곳곳을 돌며 세계경영을 주도한 이들이기도 하다. 그 무서운 경쟁력으로 못할 일이 무엇이며, 세계 어디를 간들 밥벌이 정도 못할까. 정주기-김경희 사장 부부가 터키 이스탄불에서 우리 50대의 경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박상주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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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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