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아프리카에서 '인생4모작' 행복합니다"

2013-10-21 09:08:39 게재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황재길 영파이어니어 사장

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막 먼동이 터 오르기 시작하는 아침 6시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북쪽 리보니아강변. 이곳 사람들은 강이라고 불렀지만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개천일뿐이었다. 이른 새벽인데도 개천가 널찍한 공터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퉁퉁한 몸집을 한 마음씨 좋아 보이는 흑인여자가 길게 줄을 늘어선 남루한 차림의 흑인들에게 빵과 소시지, 사과 등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한 흑인남자가 커다란 알루미늄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를 퍼서 나눠주고 있었다. 이곳저곳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다. 일찌감치 음식을 받은 이들은 모닥불 주변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개천 변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밥퍼봉사' 현장이었다. 저토록 아름다운 일을 시작한 이는 누구일까.
 


<황재길 사장은 매일 아침 개천가에서 노숙을 하는 불법체류자들에게 밥퍼봉사를 한다. 황 사장은 이들을 위한 기술학교를 세우고 싶다고 했다.
>

이때 은색 승용차 한 대가 공터로 들어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며 반백의 머리를 한 동양인 노신사가 차에서 내린다. 아담한 체구에 인자한 얼굴을 한 노신사였다. 노신사는 유창한 영어로 노숙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여러분, 오늘은 내가 조금 늦었습니다. 맛있게 많이 드세요."

노숙자들이 우르르 노인 곁으로 몰려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노신사는 일일이 노숙자들의 손을 꼭 잡아주기도 하고, 등을 다독거려준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 데 어디 아프냐고 묻기도 한다.

노신사는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휴대전화 액세서리 및 전자제품 판매 사업을 하는 황재길(70) 영파이어니어 사장이다. 지난 2012년 3월부터 미드란드 지역 두 곳의 노숙자 70여명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해온 인물이었다. 황 사장은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5시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새벽예배를 본 뒤 6시쯤 이곳 리보니아강변으로 달려와 회사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밥퍼봉사를 한다. 노숙자들은 대부분 젊은 친구들이었다. 황 사장에게 저 사람들이 왜 노숙을 하느냐고 물었다.

"남아공으로 돈 벌러 온 불법체류자들입니다. 인근 레소토왕국과 스와질랜드왕국, 짐바브웨, 모잠비크, 말라위 등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친구들이예요. 끼니 해결도 제대로 못하는 친구들입니다."

새벽녘 리보니아 강가의 밥퍼봉사는 30여분 만에 끝났다. 밥퍼봉사를 끝내면 곧바로 회사로 향하는 게 황 사장의 정해진 일정이다. 요하네스버그 북쪽 샌톤의 폴쇼프 아크터 로드 10번지에 있는 황 사장의 영파이어니어는 제법 덩치가 큰 2층짜리 건물이었다. 빨간 지붕을 한 하얀 시멘트 건물이 아주 단정해 보였다. 대지 1만㎡에 들어선 연건평 4000㎡ 규모의 건물이다. 영파이어니어는 단말기 커버와 배터리, 충전기 등 휴대전화와 관련된 모든 액세서리 및 부속품을 취급할 뿐 아니라 TV와 냉장고, 세탁기 등 리콜 가전제품을 수리판매하면서 연간 12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황재길 영파이어니어 사장이 남아공 경제금융 중심지로 새롭게 자리 잡은 요하네스버그 샌톤에 있는 자신의 회사 마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직원들의 손에 매일 아침 제공되는 샌드위치와 음료수 등이 들려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겨우 1모작으로 인생을 정리하고 뒷방으로 물러나지만 70줄에 들어선 황 사장은 여전히 아프리카 대륙과 중국, 한국 등을 누비며 인생4모작을 누리는 생생한 현역이다. 인생 1모작은 강원도 옷장사로 대풍을 거두었고, 인생 2모작은 고향 예천에서 제재소 사장으로 큰 소출을 냈으며, 인생 3모작은 서울 동대문 시장 원단 장사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이 70줄에 들어선 그는 이제 '황금의 도시' 요하네스버그에서 전자제품 사업을 하면서 인생 4모작의 화려한 결실을 거두고 있다.

황 사장의 사무실은 건물 2층에 있었다. 큼지막한 책상과 작은 원탁 테이블 하나, 중형 냉장고 등이 놓여 있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작은 원탁 테이블에 마주 앉아 황 사장의 이야기를 청했다.

- 어떻게 남아공에 오게 되셨는지요.

"제가 처음 아프리카 땅을 밟은 건 90년 4월입니다. 동대문 시장에서 원단장사를 할 때였어요. 제가 후원하고 있던 그루터기 선교회 일 때문에 보츠와나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루터기 선교회에서 보츠와나에 세운 직업기술학교를 통해 불우청소년들 자활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었거든요. 선교회 일도 볼 겸 잠시 휴식도 취할 겸 한달 예정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기후가 너무 좋은 거예요. 탁 트인 경관도 아름답고 공기도 정말 깨끗하더라고요. 서울로 다시 돌아왔는데 자꾸 아프리카의 모습이 어른거리더라고요. 그해 연말 이종사촌 누님 아들에게 가게와 직원 일체를 고스란히 넘겨 버렸습니다. 과감하게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리고는 91년 2월 제 아내와 함께 두 달 동안 유럽여행을 즐겼지요. 내가 먼저 남아공으로 와서 1년 3개월 동안 집도 빌리고, 차도 사고 하면서 가족들 데려올 준비를 했지요."

- 한국에서는 원단 장사를 하다가 어떻게 전자제품 사업을 벌이게 됐는지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원단 사업을 하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하던 일이었으니까요. 아마 93년 초쯤 요하네스버그 시내 한 복판인 프리차드 스트리트 102번지에 사무실을 하나 냈습니다. 처음 시작한 일이 원단 사업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관세가 무려 50%나 되는 거예요. 가격 경쟁력이 전혀 없는 거지요. 그런데 다른 원단 수입업자들은 물건을 아주 싸게 파는 거예요. 그래서 통관업자에게 물어봤지요. 저 사람들 물건은 어떻게 저렇게 저렴하냐, 나에게도 그런 길을 알려다오 하고 부탁을 했지요. 그런데 그건 사실상 밀수였어요. 서류상으로만 짐바브웨나 모잠비크 등 인근 국가에 들어가는 물건으로 꾸며놓고는 물건은 남아공으로 빼돌리는 방법이었어요. 참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머나먼 아프리카까지 와서 불법 탈법을 저지르면서 먹고 살아야 하나. 그래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관세를 물지 않고 사업할 수 있는 좋은 아이템 없을까요.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어요."

- 결국 기도의 응답이 휴대전화 액세서리였군요. 그게 응답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나요.

"당시 우리 동포 중에 한 분이 신발 장사를 하려는 분이 있었습니다. 94년 10월쯤이었을 거예요. 한국에서 컨테이너로 신발을 들여오면서 저에게 통관을 부탁하더라고요. 제가 원단 수입을 한 경험도 있고 해서 흔쾌하게 승낙을 했지요. 그런데 이게 세관에서 딱 걸린 거예요. 40피트짜리 컨테이너 하나 물량을 들여오는 데 그 물건 가격이 겨우 1만 달러로 책정이 돼 있었던 겁니다. 세관에서 컨테이너를 뜯었지요. 뜯어서 들여다보니까 안에는 신발만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원단과 의류, 고추장, 된장 등 온갖 물건들이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서류상 품목과 너무 차이가 났던 거지요. 그래서 세금만 무려 3만 달러나 뚜드려 맞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물건을 수입하려던 분이 불법체류자라는 사실까지 발각되고 말았지 뭡니까. 덜커덕 이민국 직원들에게 체포당해서 감방에 갇히고 말았어요. 그 일 때문에 정말 원망도 많이 들었지요."

- 황 사장님이 아주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되었군요. 컨테이너 물건들은 어찌 됐나요.

"그 짐을 제가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어요. 세관에서 다시 책정한 물건 값에다가 세금 3만 달러까지 더해서 모두 8만 달러 정도를 제가 물었습니다. 그 물건들을 우리 집에 다 쌓아놓지를 못해서 일부는 친하게 지내던 이국영씨 집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부랴부랴 신발과 원단, 옷 등은 싸게 처분을 해 버렸어요. 그런데 그 물건 중에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물건이 200여개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모토롤라 휴대전화 가죽 케이스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휴대전화가 그리 보급이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소수 부유층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뭔지 몰랐습니다. 브루마 호숫가에 아주 유명한 벼룩시장이 있습니다. 주말에 그걸 들고 그곳에 나갔어요. 한 친구가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앤드류라고 하는 백인 친구입니다. 가격 흥정을 할 것도 없이 그가 부르는 가격에 50개를 넘겼어요. 그리고는 2주인가 3주 만에 다시 벼룩시장에 나갔어요. 그랬더니 앤드류가 저를 보고는 너무 반가워하는 거예요. 그동안 저를 무척 찾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모토롤라 가죽 케이스 더 없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나머지를 몽땅 넘겨주었습니다. 그 때 연락처를 주고받았지요. 얼마 후 그 친구가 저의 사무실까지 찾아왔어요. 휴대전화 케이스를 더 구해달라고 하더군요. 이번엔 모토롤라 뿐 아니라 다른 휴대전화 케이스까지 주문을 했습니다. 당시엔 노키아와 모토롤라, 지멘스, 에릭슨 등 4개 모델이 제일 잘 나가던 시절이었어요."

- 야, 이거 뭔가 되는 물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겠군요. 더 내놓을 물건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하셨나요.

"그때가 아마 95년 초였을 거예요. 부랴부랴 한국으로 들어가서 가죽제품을 만드는 회사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장위동에 이화통상이라고 카메라 가죽 케이스를 만드는 회사도 그중 하나입니다. 가지고 간 샘플을 보여주면서 여기서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오케이 하더라고요. 거기서 2000개를 만들어 비행기에 싣고 다시 남아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걸 3개월도 안돼서 다 팔았습니다. 그러고도 계속 물건을 찾는 전화가 이어졌어요. 앤드류 뿐만 아니라 다른 매장에서도 연락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96년 초부터는 컨테이너로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휴대전화가 폭발적으로 보급되면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거지요. 어느 순간부터 전화 케이스 뿐 아니라 배터리와 충전기, 안테나 등 휴대전화와 관련된 다른 물품들도 구해달라는 요청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같이 관세를 매기지 않은 물건들이었습니다. 남들이 하찮은 물건이라고 신경을 쓰지 않는 틈새시장을 파고들어 성공을 한 겁니다. 결국 제 기도가 이루어진 셈이지요."

- 아하, 이제 오늘날 영파이어니어가 있기까지의 그림이 환하게 그려집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휴대전화 액세서리 사업을 시작하게 되셨군요.

"그 때만 하더라도 전자제품 쪽에는 문외한 이었지요.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들어보니 대만에서 휴대전화 부품이 많이 들어온다고 하더군요. 곧바로 대만으로 날아갔지요. 그곳에서 텔콤 소스(Telcom Source)라는 전자업계 전문잡지를 구해서 관련기업들의 정보를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여러 회사들을 돌아다녔는데 어느 곳 제품이 좋은 지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엔 이 회사 저 회사에 조금씩 주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납품받은 물건을 보고 부실한 회사들은 하나씩 정리해 나갔지요."

- 그러니까 항상 먼저 간을 본 것이로군요. 남아공에 처음 올 때도 가족 먼저 들어와서 영어공부하고, 미리 영주권 신청하고, 시내지리까지 세세하게 익힌 후에야 차를 사고….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미리 간을 보고, 꼼꼼하게 사전 점검하는 게 사장님 몸에 배인 듯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으로 확인하는 겁니다. 나는 어떤 물건을 주문하기 전에 반드시 직접 생산현장을 찾아갑니다. 내가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공장의 분위기는 어떤지 살펴보고, 그걸 만드는 책임자는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는 거지요. 현장에 가서 배우는 것도 많고,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배터리 공장을 찾아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충전기는 어느 회사 제품이 좋으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연줄을 총동원해서 소개도 해주고 품평도 해줍니다.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몇 군데 제품들을 철저하게 비교한 후 선택하면 큰 착오가 없더라고요."

- 모잠비크에서 마대 생산 공장을 크게 하고 있다가 접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대공장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왜 그만두셨는지도 궁금하네요.

"그게 아마 97년 4월 이었을 거예요.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산업박람회 구경을 간 적이 있습니다. 마대 짜는 기계를 전시한 부스에 들렀을 때였어요. 함께 부스를 둘러보던 관람객중 한 신사분이 우리 모잠비크에도 이런 공장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더라고요. 곧바로 시장조사를 해 봤지요. 가능성이 크더라고요. 곧바로 한국으로 나가서 마대 짜는 기계를 알아봤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퇴출되는 사업이었습니다. 문 닫은 공장의 중고기계를 헐값에 사들여서 모잠비크로 들여왔지요. 30여 년간 지속된 모잠비크 내전이 끝난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때였어요. 경제복구 작업이 왕성하게 일어날 시점이었지요. 97년 10월 'Topa International' 이라는 이름으로 마대 공장 문을 열었습니다. 모잠비크 노동장관이 매년 우리 마대 공장을 방문했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어요. 종업원을 200이나 두고 있었으니까 고용우수업체였던 거지요. 모잠비크 100대 기업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들어갔지요. 한 달 100만장 이상 마대를 생산하면서 월 30만 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주로 밀가루 공장 세 곳과 설탕공장 세 곳에 납품을 했어요."

- 그렇게 잘 나가던 마대 공장을 왜 문을 닫으셨나요.

"이곳에서도 마대는 이제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을 해서 2012년 접었습니다. 그 대신 2010년부터 새롭게 시작한 일이 있어요. 바로 부탄가스 사업입니다. 가스토브(Gastov)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아프리카는 아직도 땔감으로 숯을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모잠비크 수도인 마푸토 인근 200㎞ 반경 지역은 완전 민둥산입니다. 이제 대체 연료가 필요한 시점이 온 겁니다. 마푸토 인구 120만 명에다가 바로 밑에 있는 스와질랜드 인구 100만 명 등 기본적으로 220만 명이 우리가 겨냥하는 기본 시장이에요. 값싸게 가스를 공급할 수만 있다면 장래성이 뛰어난 사업인거죠. 그런데 막상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까 몇 가지 문제점들이 나타나더라고요. 우선 한 번 쓰고 버리는 부탄가스 통 값이 이곳 사람들에겐 너무 비싸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기존의 220g크기 부탄가스로는 하루 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어요. 그래서 일단 가스판매를 중단한 뒤 새로운 용기 개발을 하는 중입니다. 적어도 일주일 정도 사용할 수 있고, 재충전도 가능한 부탄가스 통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영파이어니어는 리콜제품을 수리해서 재판매하는 사업도 하고 있다. 현지인 직원이 드릴을 들고 LCD TV를 수리하는 있다.>

황 사장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사장의 결재를 얻으려는 직원들이 들락거리고, 책상 위 전화와 휴대전화가 번갈아 울려댄다. 마침내는 제품 구매 상담을 하려는 바이어들까지 들이닥쳐 황 사장을 찾는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 만일 70대 노인인 황 사장이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지금처럼 저렇게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을까. 역동적인 아프리카 땅이 황 사장을 더 젊게 만드는 건 아닐까.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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