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한국의 무테안경으로 검은대륙에서 대박 냈어요"

2013-09-02 16:09:43 게재

'잠비아의 오뚝이' 박익성 SM코리안 사장

 


 

잠비아는 아프리카 남부의 내륙국으로 한반도의 3.4배 크기의 나라다. 바다를 접하지 않고 있는 나라지만 잠베지 강을 비롯 카봄포 강, 렁웨봉구 강, 카푸에 강 등이 국토 구석구석을 적시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잠베지 강은 국토의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짐바브웨 국경부근에서 지구별 최대의 장관 중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를 만들어낸다.

이른 아침 박 사장과 함께 빅토리아 폭포 관광의 기점인 리빙스턴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우리나라 고속버스 못지않게 편안한 승차감을 주는 데다 음료수와 과자 등 간식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었다. 박 사장이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장장 7시간의 거리였지만 지루함을 느낄 새가 전혀 없었다.

 


<박익성 SM코리안 사장이 루사카 시내에 있는 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박 사장은 "아프리카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이라고 주장한다.>

박 사장은 경북 경산시 자인면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인초교와 자인중학, 잠깐 적을 두었던 야간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자인면을 벗어난 적이 없는 '촌놈'이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부산에서 시계방과 금은방을 겸한 가게를 하고 있던 외삼촌 밑으로 일을 하러 가면서 처음 고향땅을 떠난다.

"아버지는 고향 경산에서 시계방 겸 도장 가게를 하셨지요. 양산의 큰 외삼촌과 부산의 작은 외삼촌도 시계방과 금은방을 겸한 가게를 했어요. 저도 자연스럽게 시계수리 기술을 배우게 됐습니다."

사업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남보다도 세상의 흐름을 빨리 읽어내는 밝은 눈을 지녔다. 1982년 12월 군 복무를 마친 박 사장은 시계수리 하는 직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당시 전자시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수동식 시계 수리업의 전망이 어두울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1980년 대 초반은 전자시계와 함께 싼 값에 영화를 볼 수 있는 비디오 테이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마산에서 친구가 하고 있던 비디오 사업에 뛰어들었다. 3년 뒤인 1986년 대구에 있는 대형 비디오 스튜디오에 취직을 하게 된다. 그동안 마산에서 갈고 닦은 비디오 촬영 실력을 좀 더 큰물에서 발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송 여사와 결혼을 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경산에 분양받은 작은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내는 생활력이 아주 강한 여자입니다. 결혼과 함께 아내는 우리가 사는 아파트 상가에서 비디오 대여점을 차렸어요. 3년 정도 비디오 대여점을 하다가 대구로 이사를 왔는데, 이번엔 또 게임방을 시작했습니다. 게임방은 두 차례 가게를 늘리며 옮겨갈 정도로 벌이가 괜찮았습니다.

그러다가 횟집을 크게 벌인 게 문제였습니다. 저의 사촌 외삼촌이 충무에서 큰 가두리 양식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 분이 가두리 양식장의 고기를 대 줄 터이니 횟집을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중간 상인을 통하지 않고 직접 들여오면 횟감도 싱싱하고, 마진도 괜찮을 거라는 계산이 나오더라고요. 횟집에 올인을 했습니다. 곧바로 제 직장도 그만두고, 게임방도 정리했습니다. 대구 북구 노원동에 200㎡(60여평) 크기의 횟집을 냈습니다. 그런데 워낙 손님이 없었어요. 깨끗하게 접어버렸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박 사장 부부는 다시 원점에서 인생설계를 해야 했다. 생업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게임방 문을 열었다. 게임방 사업을 다시 시작한 지 5년 쯤 됐을 무렵이었다. 친한 친구의 처남이 잠비아에서 사진관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잠깐 들어온 일이 있었다.

"저와 그 친구는 함께 성묘도 다닐 만큼 친한 사이였습니다. 아프리카 이야기도 들을 겸 제가 식사를 한 끼 대접하겠다고 했지요. 밥을 먹는 자리에서 친구 처남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잠비아에 놀러 가도 되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두 달 뒤 진짜로 친구와 함께 잠비아 여행을 가게 되었어요."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잠비아에 도착을 하니 수도인 루사카조차도 조그마한 시골 도시일 뿐이었다. 우리나라 70년대 수준 정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친구 처남 집에 2주 동안 머물면서 잠비아 시장을 두루 살펴보았다. 가난했지만 순박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사실들도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 시장의 물건들을 잠비아 시장에 풀어 놓으면 모든 게 돈이 될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날 초대해준 친구의 처남 집에서 파티를 하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잠비아에 안경점을 내기로 했습니다. 당시 손아래 처남이 대구에 있는 안경테 제조 공장에 다니고 있었어요. 처남을 통하면 안경테를 쉽게 공급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친지들에게 제 생각을 이야기 했더니 다들 반대를 하더라고요. 아프리카에 안경을 끼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되묻더라고요. 그런데 결국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은 비슷하잖아요. 아프리카 사람들도 결국 안경을 끼기 시작할 거라는 게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안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몇 군데 안경점을 불쑥 찾아가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더라고요. 다행히 지인을 통해 대구보건전문대 부근에 있는 한 안경점을 소개 받았어요.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그곳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안경사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 까지 하나하나 메모를 하면서 배웠어요. 고객들에게 주문을 받은 뒤 렌즈 형판을 어떻게 따는지, 렌즈를 기계에 물리는 어떻게 물려서 어떻게 가는 지 어깨 너머로 배웠어요."

어느 정도 안경 기술에 자신이 붙기 시작할 무렵 박 사장은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행 준비에 돌입했다. 게임방을 처분한 돈으로 한 달 동안 대구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안경재료를 구입했다. 드디어 40피트짜리 컨테이너에 기계장비와 부속품, 안경재료, 가게 인테리어 자재, 가구 등을 채워 넣는 작업을 시작했다. 약 8000만원 어치 정도의 물품을 실은 컨테이너 문을 잠그고 봉인을 하고 나니 감개가 무량했다. 아프리카 대륙위에 인생의 주사위를 던진 기분이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꼭 아프리카에서 성공을 해서 금의환향 하겠노라고 굳은 결심을 했다.

"1998년 10월 대구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는데 아내가 흐느끼기 시작하더군요. 험한 아프리카 땅으로 기약 없는 삶의 여정을 떠나는 길이었으니까요. 마중 나온 친지들을 부여잡고 함께 엉엉 울었습니다.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면서 만 20시간 동안 가야하는 머나먼 나라였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마음을 다졌습니다. 잠비아에서 인생을 멋지게 일으켜보자!"

그런데 막상 잠비아 수도 루사카에 도착을 해보니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친구 처남이 루사카 시내 남쪽 마케니란 지역에 사는 선교사를 소개해 줬다. 시내와는 약 16㎞ 정도 떨어진 허허벌판에 있는 집이었다. 거기서 한 달 정도 신세를 지면서 점포 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은 거의 이용하지 않고 현지인들만 이용하는 12인승 미니버스를 타고 매일 시내로 나갔다. 천신만고 끝에 친구 처남이 운영하는 사진관이 입주해 있는 건물에 점포 자리 하나를 구할 수가 있었다. 잠비아에 도착한 지 석 달 만인 99년 2월 마침내 '도쿄 옵티션'이란 이름의 안경점 간판을 내 걸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안경점을 개업했지만 손님이 전혀 오질 않았다. 문자 그대로 개점휴업 상태였다. 6개월 동안 손님은 가뭄에 콩 나듯 뜨문뜨문 있을 뿐이었다. 들어오는 돈은 없고, 꼬박꼬박 월세만 빠져 나갔다. 다급한 마음에 거리로 나섰다.

"여섯 달 동안 루사카 시내를 구석구석을 돌며 스스로 만든 광고 전단지를 돌렸어요. 말이 여섯 달이지 전단지 뭉치를 손에 들고 거리를 돌아다닐 때는 정말 가슴으로 울었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무너지면 절대 안 된다, 이 고비를 이겨내야 성공할 수 있다 라며 저 자신을 다독였어요."
 

거리를 쏘다니면서 1층에 새로운 점포 자리가 없는 지 눈여겨 살펴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인도사람 소유의 상가 건물 1층에 가게자리가 하나 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부랴부랴 집주인을 찾아가 안경점으로 쓰겠다고 했더니 벌써 3~4명이 줄을 서 있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뿐이었다.

"수시로 찾아가 주인에게 인사를 드렸어요. 안경점만큼 깨끗이 점포를 사용할 수 있는 업종이 어디 있느냐고 설득을 했지요. 그때마다 기다리라는 말만 되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주인으로부터 호출이 왔어요. 반갑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정말 조마조마 했습니다. 주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랐으니까요. 주인이 마침내 입을 열더군요. 여러 사람이 신청을 했지만 당신의 성실성, 그리고 선량한 인상을 보니 이 점포를 맡길 만 하다는 판단이 든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리고 뭉클합니다.

2층에서 1층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어요. 그렇게 안 오던 손님이 이사 첫날에만 10명 이상이 몰려왔어요. 봇물이 터졌다는 느낌이 바로 그런 걸 거예요. 안경 맞추는 손님 말고도 시력 검사만 해줘도 점포 세는 빠질 정도로 손님들이 늘었습니다. 손님들이 밀려오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영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겠더군요. 잠비아는 영어를 공용어로 쓰거든요. 낮에는 렌즈 깎는 공부하고, 밤에는 집에 와서 EBS 중학교 영어회화 테이프 틀어놓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도 피곤할 줄 몰랐지요."

몇 번의 고비였던가.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일찌감치 두 손 들고 주저앉고 말았을 시련들을 박 사장은 꿋꿋하게 넘어섰다. 그런 그에게 세상은 후하게 보상을 시작했다. 매출이 가파른 상승을 시작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잠비아 안경시장에 새로운 유행도 주도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무테안경이 인기를 끌고 있었어요. 그걸 제가 잠비아 시장에 들여와 히트상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다른 안경점에선 1~2주 걸리는 것을 저는 30분에 해주었어요. 아마도 그때가 제 안경 사업의 전성기였을 거예요. 그 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습니다. 아내도 그때서야 저녁시간에 그날 번 돈을 세는 맛과 저축하는 기쁨을 누리기 시작했답니다."

2006년부터는 세탁공장까지 차리면서 박 사장의 사업은 확장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4년 여 동안 양쪽 사업장을 오가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럴 즈음 갑자기 안경시장에 불쑥 커다란 경쟁자가 출현했다. 아프리카 시장의 큰 손들 중 하나인 인도상인이 한꺼번에 4개의 안경점을 개업한 것이었다.

"위기라는 판단을 내렸어요. 인도상과 비교를 해 보았을 때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인도사람의 새로운 안경점과 경쟁을 하려면 한국인 직원을 더 채용해야 했어요. 그런데 인도사람에 비해 한국인 직원은 인건비는 훨씬 비싼 반면 영어는 현지에서 1년 정도는 생활해야 소통이 되기 시작합니다. 한 개도 아니고 한꺼번에 4개씩이나 인도 안경점이 들어선다면 경쟁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했어요. 곧바로 우리 돈 5억 원 정도에 안경점을 내놓았습니다. 다음날 바로 그 인도상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한 푼 깎자는 말도 없이 선뜻 선금까지 주면서 계약을 하더군요. 잠비아에서 처음 시작한 사업을 접는다는 게 서운했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은 진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차피 더 큰 고기를 자기 위해서는 작은 고기는 놓아 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안경점을 정리했기 때문에 새로 일을 벌이기 시작한 금광업과 건축업에 세세하게 신경을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잠비아 사람들이 '포효하는 연기'라는 뜻의 '모시-오아-투니아'라고 부르는 빅토리아폭포.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의 낙폭보다 두 배나 긴 108m를 내리꽂는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다.>

박 사장의 이야기에 홀딱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버스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고 있었다. 장장 7시간 버스를 여행을 하면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은 첫 경험이었을 것이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리빙스턴이었다. 1855년 아프리카 바깥세상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빅토리아폭포를 발견한 영국의 탐험가 D.리빙스턴을 기념하여 붙인 지명이다. 빅토리아 폭포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폭포관광의 기점 역할을 하는 아담하고 깨끗한 도시였다.

아, 드디어 빅토리아 폭포 앞에 섰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포효하는 연기'라는 뜻의 '모시-오아-투니아'라고 부른다던가! 그들의 표현 그대로 물이 떨어지는 폭포라기보다 '포효하는 연기'였다. 거대한 물줄기가 땅으로도 떨어지고, 하늘로도 무섭게 솟구치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누가 빅토리아와 미국의 나이아가라를 나란히 비교해서 세계 3대 폭포라고 명명 했던가. 빅토리아는 나이아가라 낙폭보다 두 배 가까운 108m를 내리꽂고, 강의 가로 폭 역시 나이아가라의 1㎞보다 훨씬 넓은 1.6㎞를 통해 분당 5500만 ℓ의 물을 토해 내거늘! 빅토리아 폭포가 포효하면서 일으키는 물보라에 속절없이 홀딱 젖는다. 켜켜이 쌓인 세상의 속진을 씻어내는 장엄하고 신성한 세례식!

폭포는 맨땅에 헤딩을 한다. 두려움 없이, 머뭇거림 없이, 미지의 세상으로 자신을 던진다. 장애물이 있으면 돌아가기도 하고, 웅덩이가 있으면 잠시 쉬기도 하지만 금방 또 자신의 길을 찾는다. 모름지기 세상사는 지혜는 물로부터 배울 일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던가. "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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