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김창렬의 전국일주 마라톤기행

자생식물원장의 75일 연속 마라톤 주행기

2015-02-13 12:59:20 게재
김창렬 지음 / 신구문화사 / 1만5000원

저자는 원래 정치학도였다. 박정희 군사독재시절 그의 발명품인 대통령긴급조치(9호)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다. 오랜 수감생활 끝에 사회에 복귀했지만 제도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오늘의 그가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수많은 운동권출신 청년지식인들의 창업터전인 출판계를 기웃거리는 대신 호미 한 자루를 들고 강원도 산속으로 들어갔다. 자칭 "현대판 화전민"인 그는 야산에 피고 지는 작고 예쁜 우리 꽃들을 농촌소득원으로 개발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전국 최초로 한국 고유 풀꽃과 자생식물들을 강원도의 작은 임대농장에 옮겨 심고 배양하는 일을 시작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 전례도 없었던 일을 혼자서 힘들게 해냈다.

결국은 30년이상 계속해서 전국의 가로화, 공공시설의 화단과 조경, 고궁 뜰과 정원에서 외래종을 빼내고 우리 꽃과 식물을 채워 넣는 농사꾼 겸 운동가가 되었다.

외로움과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새벽마다 오대산 산길을 달렸다. 꽃과 나무가 점점 늘어나 오대산 입구의 작은 밭은 대규모의 자생식물원과 한국 고유식물유전자원 육종연구소가 되었고 새벽 달리기는 42.195km 마라톤 풀코스 100회 완주와 국내외 대회 참가로 발전했다.

IMF시절인 90년대부터 한국에 불붙은 마라톤 붐은 "믿을 것은 내 몸 밖에 없는" 곤궁한 한국인들과 체력-체격을 단련하려는 신세대 사이에서 2000년대를 거치며 구원처럼 퍼져나갔다. 그의 식물원과 마라톤 주행거리는 함께 늘어나고 확장되었다. 식물원 안에 '100회마라톤 공원'을 만들고, 산악을 달리는 오대산 마라톤대회도 창설했다.

이 책은 그 진기한 사회적 기록이자 "언젠가 전국을 마라톤으로 일주 하겠다"는 꿈을 마침내 실현한 개인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계기는 어머니의 별세와 자신의 영혼을 울리는 중심의 괴로움이었다.

그는 초겨울부터 시작해서 험한 겨울 산길과 얼어붙은 전국 도로를 울며 달리기 시작했고 75일간 1500km의 저니 런(journey run)을 해냈다. 이 책이 좀처럼 함께 할 수 없는 조합인 '꽃과 마라톤'의 기록물이 된 이유다.

꽃이야? 마라톤이야? 전국 일주

2013년 11월 1일 오대산 자생식물원 농장 앞을 출발한 그는 동해안을 거쳐 남해안으로,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중부와 임진각을 거쳐 다시 영동지역의 출발점까지 매일 평균 20km 이상을 달렸다.

눈보라와 누적된 피로와 동상과 싸우고 바닷바람과 얼어붙는 한파와 싸우며 "오직 그만두지 않기 위해" 달린다. 마라톤 대회와 같다. 인생과 같기도 하다.

마라톤 뛰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온갖 상념과 추억들, 가는 곳마다 있는 풀꽃 채집과 배양에 얽힌 추억의 장소들, 오랜 세월 농장을 찾아주고 함께 해주었던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들, 수많은 마라톤 벗들, 그보다 더 수많은, 그동안 피고 지고 잊어지고 사라져간 풀꽃과 나무들이 머리와 가슴을 울리며 지나간다. 중간에 일부러 찾아와 함께 달리며 동반주(同伴走)를 하는 100회 마라톤 클럽의 사람들이 힘을 더해 준다.

저자의 마라톤 수첩에 그날그날 기록된 그림일기들은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겼다.

책의 구성은 이렇다. 제1부 동해안에서 남해안에는 18일 동안 평창군-강릉-삼척-영덕군-경주시-거제시까지의 기록과 강원도지역에서 꽃에 미쳐 농장일을 하던 추억담과 초기의 경험들이 실려있다. 매일 달린 코스와 구간, 달린 거리, 특이사항은 본문 끝에 길 약도와 컷을 곁들여 실었다. 꽃에 미치다, 마라톤은 구상의 시간,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나를 찾아, 42.195km를 넘어 같은 글들이 실려있다.

제2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에는 거제시-사천시-순천시-장흥군-무안군까지의 11일의 여정과 곳곳의 문화재, 풍광, 풍속, 전설을 함께 다루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사라져가는 식물들을 지키리라"는 직업적 각오도 함께 실었다.

제 3부 서해안에서 임진각으로에는 무안군-고창군-군산시-예산군-고양시까지, 제4부 임진각에서 출발점으로에는 고양시-포천시-양구군-속초시-평창군까지가 담겼다.

우리 꽃 이야기와 마라톤사진도

저자는 가는 곳마다 매우 비판적인 시선과 혼자만의 '느낌'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예리함도 보여준다.

이를 테면 부안에서 김제까지 넓은 평야 위에 일자로 뻗은 도로 위에서는 "구브러진 곳 하나 없는 직선도로는 마치 자(尺)위에서 뛰는 느낌, '징게 맹게'(김제 만경)라는 사투리가 실감났다"고 썼다.

"대한민국은 쓰레기 공화국"이라는 글에서는 "국도와 지방도로 논둑 밭둑 징검다리 할것 없이 도로가장자리가 쓰레기장이라 할만큼 수많은 쓰레기들로 넘쳐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가 정한 전국적으로 많은 쓰레기 순위는 1.담배꽁초 2.담배갑 3.일회용 컵 4.음료수 캔 5.과자봉지 6.농사용 비닐 7.작업용장갑 8.각종 플라스틱용기 9.빈라면봉지 10.고무장갑과 헌옷 이라고 시시콜콜이 관찰하고 기록했다.

언제나 꿈꾸어왔던 마라톤 전국일주를 완성한 그는 "이제 남은 꿈은 자생식물원이 아름다운 우리꽃과 나무가 오롯이 잘 지켜지는 보물창고 같은 식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나의 두 다리로 북녘 땅을 한바퀴 뛰는 것"이라고 말한다. 남북한의 사정상 그 꿈이 언제 이뤄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달리겠다고 한다.

그는 북한 땅을 달리고 싶은 생각을 반영하기 위해 일부러 임진각을 코스에 넣었다. 영하 14도의 혹한 속에서 입과 얼굴이 얼어붙고 안경에 눈이 쌓여 눈사람처럼 되어서도 북쪽을 바라보며 북한 땅에 살고 있을 역시 똑같은 우리 꽃들과 험준한 산길을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이 땅에 사는 축복, 절제와 자연사랑 속에서 사는 삶의 기쁨을 화사한 봄꽃과 얼음속에 피어있는 동백꽃 사진들과 함께 실었다.

겨울철 장거리 달리기의 고통의 기록, 저자의 쉽지 않았던 삶의 회고, 그와 대조적인 화사하고 섬세한 우리 꽃 자료사진들이 가득 실려 있는 이 책은 읽는 사람에게 고통의 간접체험과 시각적 기쁨을 동시에 전해주는 '달리는 회고록'이라 할 수 있겠다.

차미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