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직관 펌프, 생각을 열다

당신이 옳아도 논쟁에서 지는 까닭은

2015-05-01 12:14:03 게재
대니얼 데닛 지음 /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만2000원

당신은 누군가와 논쟁 중이다. 상대의 주장은 분명히 잘못됐다.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지적할 수가 없다. 그가 한 말 '자체'에는 시비 걸 게 없어서이다. 그는 '오캄의 빗자루'라는 '신공'을 쓰고 있어 당신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오캄의 면도날'은 알겠는데 오캄의 빗자루는 모르겠다고? 이런. 아는 거까지야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고, 모르는 건 알아 볼밖에.

오캄의 빗자루는 분자생물학자인 시드니 브래너가 오캄의 면도날을 비틀어 만든 신조어이다.

오캄의 면도날이, 문제를 괜히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면도날로 다 잘라 버리듯 하면 본질만 남는다는 이론-이도 꼭 옳지는 않으니 이 책을 읽어 확인하기로 하자-인 데 견줘 오캄의 빗자루는 위력이 더욱 막강하다. 곧 '지적(知的)으로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 이론을 옹호하려고 불편한 진실을 양탄자 아래로 쓸어 넣는 짓'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가 있냐고? 창조론자들은 저네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증거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이를 외면한다. 그리곤 유리한 내용만 짜 맞추어 제시한다. 그러니 설득력이 있지. 왜? 무엇이 '없는지' 전문가 아닌 사람들 눈에는 보이질 않으니까.

그러면 오캄의 빗자루를 '조자룡 헌 칼 쓰듯' 휘두르는 자들에겐 노상 당하기만 해야 하나. 그럴 순 없으니 당신도 내공을 길러 이를 격파하면 된다.

맨손에는 도구를, 맨뇌에는 생각도구를

MIT의 인공지능 분야 대가인 마빈 민스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구를 대표하여 외계인과 맞설 단 한 사람"인 대니얼 데닛이 이 책을 쓴 목적은 간단하다.

인간은 '호모 파베르', 곧 도구를 사용하면서 진화했다. 맨손으로는 목공 일조차 하기 힘든 법. 이처럼 도구를 이용해 육체노동을 쉽게 해결하듯이 생각하는 데도 맨뇌로만 고민하지 말고 '생각도구'의 도움을 받는다면 훨씬 편하고 명쾌하게 처리할 터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오캄의 면도날과 오캄의 빗자루를 비롯해 직관(直觀)을 펌프처럼 끌어올리는 생각도구 수십 가지를 한데 모았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 '개미와 베짱이' '여우와 신 포도' 같은 이솝 우화들은 쉬우면서도 우리의 직관을 강타한다. 여기 소개하는 생각도구들은 이솝 우화의 철학자 버전쯤 되는 '이야기'들이다.

이 도구들은 때론 스스로 사고를 정리하는 데 유용하고 때로는 상대의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그럴 듯한 주장을 깨부수는 데 효과적이다.

예컨대 오캄의 빗자루를 부러뜨리려면 음모론에 맞서는 훈련을 하는 게 도움이 된다. 음모론자들은 오캄의 빗자루를 휘두르는 실력이 발군이다.

따라서 인터넷에서 새로운 음모론을 검색하여 어떤 결함이 있는지를 먼저 찾아본다. 그런 다음 전문가의 반박을 읽어 확인하는 연습을 거듭하면 그까짓 빗자루쯤이야 더 이상 상대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림 없는 '화이트 직소 퍼즐'을 맞추는 법

그래도 생각도구의 개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상상력을 확장하고 집중력을 유지케 하는 직관 펌프의 예를 들여다보기로 하자.

-100km 떨어진 지점에서 두 기차가 마주보고 달려온다. 한 대는 시속 30km, 다른 한 대는 시속 20km이다. 기차가 충돌할 때까지 새 한 마리가 그 사이를 시속 120km로 오간다. 그러면 새는 몇 km를 날게 될까.

실제로 폰 노이만에게 이 문제를 물었더니 그는 즉시 "240km잖아."라고 대답했다. 노이만은 '튜링 기계'를 전자 컴퓨터로 구현한 계산 천재였다. 수학으로 이를 풀자면 무한급수를 동원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 전설적인 천재는 계산 없이 직관으로 정답을 찾아냈다(새가 날아다닌 시간만 따진다면 우리도 복잡한 수식 없이 이를 맞출 수 있다).

'화이트 직소 퍼즐'도 있다. 직소 퍼즐이야 '그림조각 맞추기'이니 당연히 바탕 그림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백지라니? 이음새만으로 맞추어야 하나.

당황할 거 없다. 직소 퍼즐이라면 어차피 그림은 그려져 있기 마련이다. 백지인 건 그 뒷면일 뿐이니 뒤집어서 시작하면 된다. 이것이 직관이다.

이밖에도 일상에서 의외로 간단하게 활용할 생각도구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래퍼포트 규칙-상대방을 비판하려면 먼저 그의 입장을 이쪽에서 명확하고 생생하며 공정하게 정리해 들려준다. 그는 내가 자신의 주장을 이해했음을 알게 된다. 이어 둘의 의견이 일치하는 지점을 나열한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에게서 배운 것을 모두 언급한다. 그러고 나서 비판하면 상대방은 귀를 기울인다.

▲스터전 법칙-영화건 논문이건, 어느 분야에서나 그 결과물의 90%는 별 볼 일 없다. 그런 걸 비판하느라 나와 남의 시간을 허비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코미디언이 아니라면 남의 작품을 희화화하지 마라. 본인만 평판을 잃을 뿐이다.

▲'당연하지'(surely)를 주의하라-논문(일반 주장을 포함해)에서 '당연하다'고 강조하는 대목은 논리의 약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독자도 확신해 주기를 저자가 원한다는 뜻인데, 실제로 독자가 확신하리라고 믿으면 그런 표현을 쓸 리가 없다. '당연하지'는 근거 없이 '자명한 진실'을 주장한다는 자백이다.

쉽고 재밌거나, 어렵고 재미없거나

미국 터프츠대 철학 교수인 지은이는 철학 말고도 과학과 공학, 종교를 넘나드는 다양한 연구 활동을 하면서 늘 혁신적인 주장을 펼쳐 주목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재치 있고 과감한 글솜씨로 풀어낸 여러 저작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완전히 새로운 내용도 없는 이 책을 낸 까닭은 일반인 눈높이에 맞춰 자신의 학설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책은 다양한 생각도구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면서 결국은 '진화' '의식' '자유의지'라는 저자의 전문 영역으로 독자를 이끈다.

그래서 이 책을 선뜻 권하기에는 망설임이 따른다. 누구에게나 쉽고 재미있으리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어려운 듯하면서도 재미를 느낀다면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읽기를 바란다. 추천사에 나오듯 '엄청난 지적 근육을 갖게 될 터'이니까.

이용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