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같은 공간, 다른 시간

반세기 전 우리의 민낯을 응시하다

2015-06-26 13:08:09 게재
김중순 지음 / 나남 / 1만8000원

22일은 한일국교정상화 50년이었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한일 간의 관계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우리 사회의 변화역시 상전벽해라 할 만큼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특히 민초들의 삶에 있어 엄청난 변모가 있었다.

여기 당시 남한 땅의 평범한 실상을 한발 두발 디디면서 정밀하게 탐사한 기록이 있다. '1960년대 한 법학도가 바라본 한국의 참모습'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은 원로 인류학자이자 대학총장인 저자가 자신의 뜨겁던 젊은 날의 기록이자 한 시대의 증언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기고자 오랜 시간의 숙고를 거쳐 반세기가 지난 지금 펴낸 책이다.

저자는 고 함병춘 당시 연세대 교수가 주도한 '한국 사람들의 법의식에 관한 연구'의 연구원으로 1963년 10월부터 1965년 6월까지 대학원생 신분으로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소양강에 이르기까지 전국 자연부락 500여 마을을 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우리 산하와 서민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따라서 그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당시의 다양한 지역과 계층, 연령을 아우르는 폭넓은 시선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고찰할 수 있는 지혜와 통찰이 녹아 있고, 무엇보다 당시의 참모습이 그려져 있다.

놓치기 쉬운 시절 민초들의 삶

우리가 생각하는 1960년대 한국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도시화, 경제개발, 민주화 운동 등 정책과 사상의 흐름으로만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은 이러한 추상적 이해에서 놓치기 쉬운 그 시절 우리 민초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환경과 문화 속에서도 소박한 꿈과 진솔한 고민을 품고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다. '나그네'이자 '정체불명의 사나이'인 저자는 때론 간첩으로 오해받아 문전박대의 설움도 겪고 때로는 나라에서 시찰 나온 '높으신 분'으로 오해받아 대접받기도 했지만, 마을을 떠날 때쯤이면 아름다운 풍광과 살가운 인심에 물들어 발걸음을 떼기 힘들 때가 많았다.

그는 '7000피트 상공에서 보기가 아깝고 가까이 다가앉아 주옥같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제주에서는 통역이 있어야 대화가 될 정도로 이국적인 언어를 현실로 맞딱뜨린다. 최신식 호텔과 돼지우리를 겸한 뒷간 사이에서 등고선(等高線)에 따라 문화가 바뀌는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는가 하면, 4·3사건의 영향으로 육지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낮아 경계심을 보이는 풍토를 천착한다.

그런가 하면 목포에서 만난 문학소녀 가이드 K양이 쓴 글에선 만만치 않은 내공과 함께 당시 서서히 일기 시작한 무작정 상경 행태를 고발하기도 한다. 다음은 그 일부.

"목포 가시내들 고동색 피부를 갖고 기름기 바랜 머리털과 풍만한 유방을 가졌소. 갯내가 밴 얼굴엔 언제고 쾌활한 웃음이 머물고 있고, 때로는 담배연기에 젖어 있기도 하며, 또 때로는 우리 고장에서 생산되는 '술'에 취해 있기도 하오.…그 후 몇몇은 고향을 뛰쳐나갔소. 그리고는 고향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오."

젊은 처자 인터뷰하다 봉변(?)

그러다가 예상 밖의 혼쭐도 난다. 인터뷰 표본으로 뽑힌 젊은 처자를 방문해 이것저것 묻다가 마침 귀가한 그의 모친으로부터 봉변을 당한 것이다. 멀쩡한 자기 딸을 꾀러 온 것으로 착각한 모친에게 떠밀려 다리를 접질러 한동안 절뚝거려야 했다.

그런가 하면 아이를 데리고 있던 젊은 아낙과의 인터뷰에선 묘한 긴장이 조성되기도 한다.

"이번에는 젊은 아주머니의 차례였다. 바다로 향한 아담한 집은 마루가 깨끗하고 바다로 향한 전망이 시원했다. 마루를 가로질러 매어 놓은 요람 위에는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아기를 깨울세라 조심조심 얘기를 나누었다. 바다를 마주 대하고 사는 사람 같지 않게 얼굴색이 투명하고 깨끗한 여인이었다.

소매 없는 겉저고리인 소데나시 차림이라 좀 부끄러운 지 시선은 그 넓은 바다로 향했다.

젊은 외간 남자와 마주 보기가 민망하고 수줍은 듯한 태도였다. 꾸밈없이 소박한 차림이 그토록 매력적인 줄 처음 알았다."

그런가 하면 '병풍 너머' 인터뷰를 요구하던 괴산 양반마을의 할아버지, 울산 바닷가 마을의 자연을 닮은 구릿빛 사나이와 해맑은 아낙네, 부산 전차 역을 아버지의 '직장'으로 소개하던 천진난만한 지게꾼의 어린 딸은 그가 만난 그 시절 우리네 서민들의 적나라한 민낯이었다. 그중 지게꾼 딸과의 대화를 엿보자.

"아버지 어디 가셨니?"

캐러멜 덕분인지 그 아이는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우리 아버지예? 직장에 가셨는데예."

"직장이 어딘데?"

"내 따라 오이소."

아버지의 직장으로 나를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 한참 고부랑길을 돌아 전차표 파는 가게 옆에 다다르자 꼬마아이는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부지예!"

그 소리에 한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일어섰다. 그가 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인 듯했다. 꼬마가 이야기했던 아버지의 '직업'은 날품팔이 지게꾼이었고, '직장'은 전차역 앞 길가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금은 전혀 달라진 몇몇 도시의 당시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철의 도시가 된 포항은 당시엔 유전(油田)을 꿈꾸는 도시였고, 수안보는 당시 흔치 않은 쉼터였으며, 울산은 여자귀신을 만날 전도로 으슥한 곳이었다.

저자는 반세기가 지난 후 예전 방문지역을 재방문하는 애프터 서비스도 잊지 않는다. 재방문을 통해 그는 제주도에서 더 이상 식수 걱정이 없어졌음을 알게 되고 수영비행장 자리엔 거대한 센텀시티가 들어섰음을 보며 아련한 소회에 젖는다.

반세기 지난 뒤 느끼는 소회도

저자는 연세대와 동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미국 조지아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부터 2001년 귀국하기 전까지 미국 테네시대학에서 인류학 교수를 역임했다. 2001년 이후 고려사이버대 총장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직을 겸하고 있다. 2007년부터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온라인을 통해 한글을 가르치는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작년부터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온라인을 통해 한글과 한국문화를 알리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사족 하나. 이 책이 햇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저자 가문의 높은 기록 보존 의식 덕분이다. 저자는 200자 원고지 1000매 가까운 원고를 한국에 두고 유학을 떠났는데, 그 원고가 큰 형수의 정성으로 경북 봉화에 있는 저자의 생가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윤재석 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