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부정 본능

현생인류를 만든 건 '현실부정'이다

2015-07-03 11:52:35 게재
아지트 바르키 외 지음 / 노태복 옮김 / 부키 / 1만8000원

우리 인간은 누구인가. 어떻게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왜 우리 인간은 지금 이대로의 모습인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는 철학적·종교적 명제이자 과학적 의문의 대상이다.

전통적인 진화론에서는, 진화하는 과정에서 인간 두뇌에 매우 특별한 일이 생겨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는 전제 아래 그 '특별한 일'을 찾는 데 집중해 왔다.

그러나 지은이는 역발상으로 접근한다. 어떤 진화 과정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는가를 추적하는 대신에, 다른 많은 지적인 종(種) 역시 수백만 년 진화했는데 왜 인간처럼 복잡한 정신적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했느냐를 밝혀내야 한다고.

진화의 일정 단계에서 '자기 인식'을 가진 동물은 인간 말고도 여럿 있었다.

침팬지와 고릴라 등 영장류, 고래 종류, 까마귀를 비롯한 일부 조류와 코끼리 들이다.

진화의 경쟁자, 코끼리의 지적 능력은

예컨대 코끼리는 사람에게 복수할 정도로 지적 능력을 갖췄다. 케냐의 암보셀리 국립공원은 코끼리 보호구역이다. 이곳 코끼리들이 떼 지어 몰려와 곡물을 먹어치우자 마사이족은 몇 마리를 죽였다.

나머지 코끼리들은 바로 반격에 나서 마사이족의 소들을 짓밟았다. 마사이족에게 소는 친족 다음으로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복수나 하는 것처럼.

그뿐만이 아니다. 코끼리 사회에는 '할머니'가 존재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폐경을 해 더 이상 출산할 수 없는 암컷이 무리에 속해 있다는 건 수수께끼이다.

그런데도 코끼리 떼에서는 늙은 암컷이 딸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는 광경을 종종 보게 된다.

코끼리가 남달리 영특한 동물이라고 해도 인간과 직접 경쟁하기는 힘들 터. 실제로 현생인류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는 친척뻘인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었다.

우리의 원초적 조상이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과 아시아로 이주했을 때 그들은 이미 선주민으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보다 뇌가 크고 더 나은 석기를 사용했으며 불을 다룰 줄 알았다.

2010년에야 또 다른 고생(古生)인류로 확인된 데니소바인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공동 조상을 가진 이 '세 인류'는 교배하기도 했고 그래서 지금도 대다수 유럽·아시아 출신에게는 네안데르탈인의 DNA가, 동남아 일부 주민에게는 데니소바인의 DNA가 적으나마 남아 있다.

그런데도 네안데르탈인·데니소바인은 멸종했고 현생인류는 살아남았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고등동물이 '자기 인식'을 갖게 되면 이어 다른 개체 또한 마찬가지임을 알게 된다. 타자(他者)의 의도를 이해하는 능력, 곧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음'은 진화에서 치명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한다. '마음'을 갖게 되면, 타자의 죽음을 보며 자신도 언젠가는 이를 피할 수 없다는 '필멸성(必滅性)'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코끼리를 예로 들어 보자. 코끼리 한 마리에게 돌연변이가 일어나 다른 코끼리와 달리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공유할 친구들이 없기에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면, 이 코끼리는 자신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공포심을 느껴 결국에는 짝짓기 경쟁에서 밀려난다.

위험하게 몸싸움을 하다 큰 상처를 입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걸 아는 코끼리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기란 어렵다.

진화를 가로막은 '마음'이라는 장벽

지은이들은 이 같은 상태를 '심리적 진화 장벽'이라고 이름 지었다. 아울러 인류와 경쟁할 법한 다른 생명체들이 일정 단계에서 진화를 멈춘 까닭이 심리적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럼 인간은 이 장벽을 어떻게 돌파했을까.

인간에게는 '현실 부정'이 있었다. (이 책의 원제 'Denial'을 지은이들은 '고통스러운 현실, 생각 및 감정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왜 인간에게만 '부정'이라는 기제가 생겼는지를 현재 과학 수준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단초는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에 출현한 초기부터 드러난다.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골이 이스라엘의 스컬 동굴에서 발견되었을 때 유골 주위에는 멀리서 가져온 조개껍질이 있었고 팔에는 야생돼지의 아래턱뼈로 만든 장식품이 끼어 있었다.

당시에 이미 죽은 이를 애도했으며, (남을 의식해) 장식으로 꾸밀 줄 아는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실 부정'은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해 준 묘약이었다.

따라서 '부정'의 유전자를 갖춘 우리의 조상들은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효력은 이 시대에도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대인은 몸에 나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담배를 피우고, 위험하다는 경고를 무시하면서 안전띠를 매지 않는다. 죽음의 현장인 전쟁터에 자원해서 나가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4000년도 더 전에 나온 인도의 베다 문학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인간은 죽는다는 한계를 뻔히 알면서도 마치 자신만은 불멸의 존재인 양 살아간다.

이성 마비시키는 감성이 진화의 핵심

이제는 인간의 본성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인간의 '현실 부정'은 우리가 지구상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감성 능력이 진화 과정에서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다루었기에 읽는 데 편치 않은 부분이 분명히 들어 있다. 하지만 쉬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전문적인 용어, 개념을 슬쩍 슬쩍 뛰어넘으며 읽다 보면 쏠쏠한 재미에다 지적 충만감까지 준다.

특히 △개는 과연 인간과 소통할 만큼 영리할까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는 자폐증(서번트 증후군)의 원인은 △간디의 비폭력 원칙이 성공한 까닭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왜 생길까 등등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일독하기를 권한다.

이용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