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70주년 - 재조명 받는 여성독립운동가

무장전사부터 기생까지 항일투쟁

2015-08-13 11:16:18 게재

발굴인물은 266명 불과

인명사전 발간 예정

"을미년에 민 중전께서 돌아가고 사람들이 크게 들고 일어났어. 1895년 을미의병 말이지. 내 남편 또한 그해 의병으로 나갔다가 며칠 싸워보지도 못하고 왜놈들 총에 세상을 떠났어. 남편은 온통 피투성이었지. 나는 남편이 입고 있던 피 묻은 삼베적삼을 벗겨내서 입었어. 3.1운동 때도 청산리전투에 나갈 때도, 나는 그 적삼을 벗지 않았어. 잠잘 때도, 일을 할 때도,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러 떠나는 길에도 남편과 함께 했지. 삼베 적삼은 나의 방패였고, 나의 깃발이었고, 나의 남편이었고, 그리고 나였어."

영화 '암살'의 저격수 안윤옥의 실제 모델로 꼽히는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1872~1933) 선생의 이야기다.

광복 70주년, 영화 '암살'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멀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 받고 있다.

영화 속 안윤옥은 암살에 성공하지만, 실제 남자현은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실제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그와 같은 여성의 활약이 깊게 새겨져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군 양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1901~1988) 선생의 일생을 보면 알 수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시인이 권 선생의 시동생이다.

빼앗긴 하늘을 날고 싶었던 권 선생은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기로 결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비행기 구입을 요청했지만, 재정난으로 무산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 6개월 동안 갖은 고문을 당한 이병희의 증언은 여성독립운동에 대한 재조명을 이끌어냈다.

이병희(1918~2012) 선생은 사망 전 "자궁에 막대기를 넣고 휘저은 고문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차라리 죽이라고 했다. 나라를 구하려면 자기 목숨 내놓아야지"라고 회고했다.

'3·1 혁명' 시기에는 전국 각지의 기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애국기생'으로 불린 이들은 만세운동을 주도해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그 이름들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고난의 기나긴 항일투쟁을 함께 한 여성독립운동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찾아낸 여성독립운동가는 266명에 불과하다. 보훈처가 서훈한 여성독립운동가 248명에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발굴한 인물까지 합한 숫자다.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전시하고 있다. 오는 11월에 270여명의 여성독립운동가 인명사전도 발간한다.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은 "흔히 독립운동하면 남성의 전유물처럼 생각하는데 항일투쟁의 현장을 누빈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많다"며 "후손들은 그들의 업적을 발굴해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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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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