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사부터 애국기생까지

광복 70년, 이름없는 여성독립투사 기억하자

2015-08-13 11:20:17 게재

여성독립운동기념회

10명의 이야기 재구성

서대문형무소 특별전 개최

'3·1혁명'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여성은 없다. 여성으로는 유관순 열사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3·1혁명' 당시 검거된 1만 9525명 가운데 학생과 교원이 2335명이고, 그 중 여교사와 여학생이 218명이다. 당시 여성의 취학률이 남성의 100분의 1도 되지 않던 상황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여성이 항일투쟁에 나섰다.

정신여교 교원 김마리아,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이정숙 등이 결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대표적이다. 이들 같은 지식인 여성뿐만 아니다. 800명의 화류계 여성들이 '애국기생'이 되어 시위에 참가해 고초를 겪었다.

여성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들려주고 있는 서대문형무소.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애국기생' 김향화(1897~?)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이렇게 재구성했다.

"나는 잊힌 이름이야. 서울에서 태어나 수원에서 살았지.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아. 흔히들 나 같은 사람을 해어화라고 불렀단다. 말을 알아듣는 꽃. 그래, 맞아 나는 기생이었어. 그래도 말야. 기생도 나라가 있거든. 기생고 고향이 있고, 기생도 민족이 있어. 기생도 아픔이 있어. 노래하고 춤만 출 줄 아는 건 진짜 기생이 아니야. 1919년 기미년이었어. 다들 알고 있을 거야. 3.1운동이라고. 나는 수원에 있는 벗님네들을 모아서 큰길로 나가 만세를 외쳤지. 노래하던 목소리로 만세를 외쳤지. 수원에서는 우리가 처음 만세를 불렀다고 하더군. 옥살이를 육 개월 마치고 나와, 삶이야 고단했지만 죽은 사람도 있는 걸. 고종이 돌아가시고 또 1926년 순종이 돌아가셨지. 팔도 기생들은 하나같이 국상 깃옷을 입고 술을 따르고 거리를 오갔지. 후배 기생이 우리 뜻을 이어받았던 것이라고 나는 믿어. 그날 나는 숨어서 울었어. 후배들이 자랑스러워서 울었고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지만 말할 수 없는 기생이라서 울었어. 그래, 나는 잊힌 이름이야. 나는 3.1만세운동 주동자라고 아주 나중에 나라에서 내게 상을 내렸는데, 나는 죽고 상장을 받을 사람이 없어서 내 상장은 아직 수원박물관에 있어. 부탁이 있어 나를 찾아줘. 내가 누구인지, 나를 찾아줘. 나는 잊힌 이름이야. 김향화, 향기로운 꽃. 나는 독립의 향기로운 꽃이고 싶었어. 부탁이 있어. 나를 찾아줘."

조선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재조명받고 있는 권기옥(1901~1988) 선생의 일대기는 영화와 같다. 조선 여류비행사 이야기는 실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흔히 나를 조선 최초의 여류비행사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말은 반만 맞다고 생각해. 내가 비행기를 탄 것은 여류 최초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조국독립을 위한 것이었어. 나는 권기옥이야. 비행기로 날아올라 빼앗긴 내 조국 하늘 한 가운데를 타고 내려와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자 했어. 임시정부에게 비행기 한 대만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지. 빼앗긴 하늘을 되찾고자 나는 날마다 하늘로 날아올랐어. 내 시동생이 이상화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 시를 알 거야. 내 남편은 이상정이야. 독립군 장군. 오늘만이라도 너를 나의 비행기에 태우고 나의 하늘을 날아오르고 싶어. 오늘은 광복절이잖아."

여성독립운동가는 이름이 없다.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이봉창 의사를 도운 이화림 선생.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으로 살지 못했다.

조마리아(?~1927) 여사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내 이름을 잘 모를 거야. 여인네들은 이름이 있어도 이름이 없으니까. 응칠이라는 아들을 두었다고 하면 조금 기억이 날 거야. 응칠이는 어렸을 적에 입이 너무 빨라서 별명이 뇌구였어. 번개입 말이지. 그래서 내 남편 안진사가 이름을 새로 지어주었단다. 무거울 중, 뿌리 근, 중근. 1909년 10월 26일 날 아침 9시 30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거꾸러뜨린 그 중근이가 내 아들이야.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한가지만은 빼먹고 싶지 않아. 내 아들 중근이가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 나는 편지를 썼어. 그 뒤로도 나는 내 아들 중근이보다 16년이나 더 살았단다. 내 아들보다 16년이나 더… 16년이나 더. 내 앞의 생은 응칠이네 엄마로 살았다면 16년은 안중근 어머니로 살아야 했단다. 눈 내린 서백리아를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 내달리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는구나. 언젠가... 그 이야기도 들려줄 날이 있겠지."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266명의 이름을 전시하고, 그 중 10명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서대문형무소에서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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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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