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의 금융교실

장수(長壽) 축복인가? 악몽인가?

2017-03-27 10:41:01 게재
'노후파산: 장수의 악몽'이란 책을 읽었다. 고령화로 진통을 앓고 있는 일본사회의 민낯을 생생하게 담아낸 책이다.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아주 흥미로웠다. 2014년 9월 일본 NHK가 제작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이에 앞서 2013년 11월 NHK는 '치매환자 800만명 시대'를 방영했다.

촬영을 위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치매 노인들을 취재하던 중 고령자 상당수가 파산상태라는 사실에 놀란 제작진은 이듬해 9월 후속 편인 '노인표류사회, 노후파산의 현실'이란 제목의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방송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이 때부터 의식주 모든 면에서 자립능력을 상실한 노인의 삶을 일컫는 '노후파산'이라는 말이 일상화됐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독거노인만 600만명이 넘고 그 중 200만여 명이 노후파산자로 분류된다. 상당수가 돈이 없어 전기마저 끊고 산다. TV 대신 라디오를 들으며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 주위엔 친구도 없다. 하루하루를 절망과 고독 속에 살아가는 삶이다.

문제는 그 누구도 노후파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노후파산은 흔히 생각하듯 저소득층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대기업사원·은행원, 심지어 안정적인 직업의 대명사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피해가지 못했다. 노후파산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상황·고령화·가족붕괴·청년실업·사회보장제도의 구멍 등 사회·경제현상들이 맞물려 벌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율이 49.6%(2015년 기준)로 OECD 국가 중 1위다. 노인빈곤율이란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전 국민 중위소득의 50% 미만 소득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노인의 비율로, 높을수록 노인의 생활수준이 낮다는 의미이다.

노후파산, 남의 일 아니다

우리보다 노인정책에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일본은 우리에 비하면 한결 상황이 나은 편이다.

일본 전체의 가계금융자산 (1700조엔) 가운데 최소 60% 정도를 노인들이 갖고 있다. 노인 빈곤율도 19%에 불과하다.

그런 일본에서 노후파산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면 노후파산이 우리 고령세대의 모습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미 노후파산은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해 3월 서울중앙지법은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60대 이상이 전체의 24.8%에 달한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빚의 굴레에서 허덕이다 파산한 4명 중 1명이 노인이라는 것이다. 우리사회도 이미 일본처럼 '노후파산'이 현실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4년까지 3년사이에 60세 이상 고령층가구 다섯 가운데 하나가 빈곤층(중위소득의 50%미만)으로 전락했다. 노인 자살률 역시 OECD 국가 중 1위로 올라선지 오래다. 노인 자살률은 2014년 기준 10만명당 55.5명으로 전체 자살률의 2배를 넘었다. 매년 3,000명이 넘는 노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마디로 장수가 악몽이 되는 시대가 이미 대한민국을 덮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노후파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니 한국의 노인들은 얼마 안 되는 노후자금마저 자녀 결혼비용이나 교육자금으로 탈탈 털어 붓고 있기에 상황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자식에게 부양료를 요구하며 낸 '불효 소송'건수가 2004년 135건에서 2014년 262건으로, 10년 사이에 배가 됐다. '최후의 보루'인 국민연금도 미덥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장수가 악몽이 될 수 있는 시대

'장수만세라는 인기 TV프로그램이 있었다. 이름 그대로 장수하신 어르신들이 주인공이었다. 출연하신 어르신들은 구수한 입담이나 판소리, 대중가요로 재주를 뽐내셨다. 그 시절에는 프로그램 이름 그대로 장수는 만세를 부를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부모가 회갑을 맞으면 장수를 누린 것을 축하하기 위해 빚을 내서라도 잔치를 성대하게 치렀다. 어르신들의 환갑날은 동네 잔칫날일 정도였다. '칠순 잔치'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수가 악몽이 될 수 있는 시대다. 노인파산은 만세가 아닌 비참한 장수를 의미한다. 요즘을 100세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그 길어진 삶의 길이가 누구에게나 똑같이 느껴지지는 않을 터이다. 장수는 은퇴 후 수 십 년을 돈 걱정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준비된 이들에게는 여유롭고 풍요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장수가 축복인가 악몽인가의 여부는 결국 '충실한 노후준비'에 달려있다. 장수를 축복으로 연결시키자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박철 KB국민은행 인재개발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