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오늘, 통화정책 기본이 바뀌었다

2017-08-10 12:12:14 게재

BNP파리바 인출 거부

블룸버그통신 9일자 보도에 따르면 정확히 10년 전인 2007년 8월 9일(현지시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였던 장 클로드 트리셰는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생말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 은행 BNP파리바가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와 연계된 3개 투자펀드의 인출을 거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팩스와 전화를 통해 트리셰 총재와 ECB 간부들은 대응책을 모색했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ECB가 자본시장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금융기관들이 요청하는 대로 초단기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것. ECB는 당일에만 950억유로(1120억달러)의 긴급자금을 각 은행에 융통했다.


트리셰 총재는 2005년 이후 '리프라이싱'(repricing, 국채 등 자산가격의 재산정) 리스크에 대해 줄곧 경고해온 인물이다. 하지만 2007년 여름 심각한 징후가 많았음에도 그는 별 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ECB 내 다른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9일 사건이 터지기 일주일 전 트리셰 총재는 즉석 기자회견을 자청해 '금리인상이 임박했다'고 브리핑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중앙은행 총재였던 머빈 킹 역시 낙관적이었다. 그는 BNP파리바가 인출을 거부하기 하루 전 "현재까지 금융시스템에 위협이 될 만한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국제적 금융위기는 없다"고 단언했다.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뿐 아니다. 대표적인 지표도 제역할을 못했다. 온라인매체 제로헷지에 따르면 금융위기가 닥치는 동안 전 세계 모든 금융상품의 기준점이라는 리보금리는 경고음을 발동하지 않았다. 시장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3개월 달러 기준 리보금리'는 그해 내내 미동도 하지 않다가 BNP파리바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단 48시간 내 20bp(0.20%p) 급증했다. 사람이나 시스템이나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BNP파리바의 인출불가 선언은 전 세계 자본시장의 신뢰를 일시에 무너뜨린 촉매제였다. 한달 뒤 영국 노던록은행에서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이 일어났다.

당시 메릴린치증권 트레이더였다가 현재 영국 포츠머스대 선임강사로 있는 알렉시스 스텐포스는 온라인매체 '컨버세이션' 기고문에서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그는 "갑자기 모든 은행이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사활이 걸린 모양새였다"며 "BNP파리바가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에 노출된 펀드의 인출을 막으면서 갑자기 모든 유동성이 증발해버린 극심한 신용경색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스텐포스에 따르면 2007년 2월 이미 주요국 자본시장에서는 유동성이 마르기 시작했다. 일부 헤지펀드와 은행은 심각한 손실을 기록했다. 이런 불안감이 유럽 시장으로 확산됐다. 투자기관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고 한다. 부실자산이 이 트레이더에서 저 트레이더로, 이 은행에서 저 은행으로 떠넘겨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BNP파리바가 16억유로의 펀드를 동결했다는 뉴스가 날아들었고, 그걸로 게임은 끝이었다.

2007년 8월 9일을 기점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이 등장하게 됐다. ECB는 물론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나 영국중앙은행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금융권의 공멸, 경기침체, 국채시장 충격 등을 막기 위해 초저금리와 양적완화를 동반하는 정책을 선보였다. 이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어때야 하는지, 어떤 게 가능한지 등에 대한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중앙은행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자산시장은 크게 웃었다. 도이체방크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주요 금융시장의 명암은 갈렸다. 38개 주요 자산시장 중 27곳은 미 달러 기준으로 올랐고, 11곳은 낮아졌다. 최고의 실적을 낸 건 S&P500지수로 10년 동안 106% 상승했다. 미국 고위험채권(하이일드본드)은 95%, 금값은 87% 상승했다. 다른 선진국 채권시장도 35~80%의 성장세를 보였다. 유럽 증시 중에서는 독일 닥스가 38% 올라 최고를 기록했다. 범유럽지수인 STOXX 600은 22%, 영국 FTSE 100지수는 12% 상승했다. 반면 그리스 증시는 -82%, STOXX 은행지수는 -54%, 포르투갈 증시는 -42$, 원자재지수 CRB는 -42%, 이탈리아 증시는 -33%, 국제원유는 -32% 하락했다. 신흥국 증시는 평균 29% 상승했지만 중국은 -2%, 브라질 -26%, 러시아 -32%의 좋지 못한 성적을 냈다.

한편 전 세계 총부채는 큰 폭으로 늘었다. 2002년 86조달러에 불과했던 전 세계 총부채는 2017년 1분기 현재 217조달러로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을 모두 합한 것의 3배가 넘었다(327%).

이제 미국은 물론 유럽도 통화정책 정상화 과정을 모색중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은 여전히 초저금리와 중앙은행의 자산매입에 길들여져 있다. 정상화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게다가 정상화 과정이 의도대로 효과를 발휘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10년 전 ECB 이코노미스트였고, 현재는 영국 옥스포드대학 산하 연구기관인 옥스포드이코노믹스에서 일하는 제임스 닉슨은 "ECB는 비정상적 통화정책에 깊이 깊이 개입해야 했다"며 "따라서 거기서부터 되돌아오는 과정도 10년이 넘게 걸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UBS 수석이코노미스트인 라인하드 클루제는 "비정상적 통화정책은 미래에도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미 한 차례 경험해봤기 때문에 그때에는 더 이상 비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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