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용산공원 조성, 범정부적 기구 제안한다

2017-09-06 10:37:03 게재
대촌 단내촌 정자동 신촌…. 한국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韓國龍山軍用收容地明細圖)에 기록된 옛 둔지미 한인마을 지명이다. 111년 전 용산은 원효로 일대 용산방(龍山坊)과 후암·이태원·서빙고동 일대 둔지방(屯芝坊) 등으로 구분됐다. 둔지미 마을은 조선 후기 둔지방의 일부였다.

명세도에 기록된 '구역별 철거기한'을 살펴보면 1906년 6월부터 1907년 4월까지 둔지미 마을에 대한 강제철거가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촌(新村)은 비교적 규모가 큰 마을이었는데 1908년 모두 강제이주 당했다. 이곳에 일본군사령관 관저가 들어섰고 이후 인근에 미8군 드래곤힐 호텔이 자리 잡았다. 후암동~서빙고동 옛 길도 눈에 띈다. 선조들이 수백년동안 이용했던 흔적들이 온새미로 배어 있는 길이며 조선통신사 또한 이 길을 통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픔의 역사에 저항의 역사 더해져야

잊고 있었다. 용산기지 이전에, 일제군용지 이전에도 이 땅은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금단의 땅으로만 여겨졌던 용산기지가 111년 만에 대한민국 국민 품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아픔의 역사만 이야기해온 것이다. '아픔의 역사'도 역사인 만큼 잘 보존해야 한다는 논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여기에 '저항의 역사'도 더해져야 한다. 용산구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사료를 수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앙정부에서 시도하지 않은 근본적인 작업들을 차근차근 진행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명세도를 포함한 일제 용산군용지 수용 관련 문건을 찾은 것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다.

9장의 명세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300만평에 이르는 용산군용지 면적과 경계선이다. 최종 군용지 면적은 118만평으로 당시 선조들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19와 5.18, 촛불 승리를 이끌어 낸 우리 민족의 저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대한매일신보 1905년 8월 11일자에는 '그저께 하오 2시쯤 일본 헌병 몇 명이 이태원 등지 둔지미·촌리·와서·서빙고에 사는 동민 10명을 체포하여 명동 군사령부로 이송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용산에 군대를 주둔하기로 하고 '용산 일대 가옥과 무덤을 이전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선조들의 저항정신이 남아있는 이 땅이 우리에게 돌아온다. 미군 잔류 시설들을 오롯이 남긴 채 말이다. 외국군 주둔지이기 이전에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만큼 조금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겠다. 용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 그 자리에 용산공원이 조성된다. 358만㎡(약 108만평) 가운데 전쟁기념관 국방부 등 정부시설과 미국 대사관 예정부지, 드래곤힐 호텔 등 미군 잔류 부지를 제외하면 243만㎡ 규모다.

백번 양보해서 국가안보상 존치돼야 하는 시설이라면 국민들 동의와 이해를 구한 다음 공원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는 범위 내에서 가장자리에 재배치해야 한다. 어렵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20여년 전 아리랑 택시부지로 사용됐던 지금 용산구청 부지를 돌려받은 경험이 있다.

우리가 놓친 것은 없는지 신중해야

미군 잔류 시설에 대한 논의만큼 부대 내 환경오염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복원계획 수립도 중요하다. 공원이 조성된 이후에 발생할 교통 문제 논의도 선행돼야 한다. 무엇보다 선조들의 역사를 최대한 살리는 작업 또한 병행돼야 한다. 공원 조성과정에서 후암동~서빙고동 사이 옛 길은 충분히 복원 가능하다. 그밖에도 우리가 놓친 것은 없는지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용산공원 특별법을 개정해 국토교통부는 물론 환경부 국방부 서울시 용산구 등 다양한 주체가 공원조성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총리실 산하에 '범정부적 기구' 마련을 제안한다.

성장현 서울 용산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