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의 적' 디플레이션과 싸우는 세계 중앙은행

2017-09-08 10:49:50 게재
지난달 25~27일(현지시간) 전 세계 중앙은행장들이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 모였다. 세계 중앙은행장 연차총회였다. 하지만 웬일인지 통화정책 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요 주제는 '역동적인 글로벌 경제 만들기'였다. 유럽중앙은행(ECB) 주최 연례 모임에서도 비슷했다. 주요 논의주제가 '선진국의 투자와 성장'이었다.

각국 중앙은행장들이 모여 경제성장과 무역, 투자 등 전 세계가 직면한 경제 분야 도전과제를 논하는 게 잘못일 수는 없다. 하지만 중앙은행은 설립취지상 경제성장과는 무관하게 물가안정을 유지해야 하는 곳이고, 그 때문에 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을 인정받는 기구다. 중앙은행들은 왜 자신의 고유영역 대신 외적인 이슈에 초점을 맞추게 됐을까.

벨기에 소재 싱크탱크인 '유럽정책센터'(CEPS)의 대니얼 그로스 디렉터는 7일 프로젝트신디케이트 기고문에서 "중앙은행들 스스로도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로스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근무했고 유럽위원회와 유럽의회, 프랑스 총리·재무장관 등의 경제자문을 지낸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상황은 과거보다 통화정책을 펴기에 유리하다. 특히 역사가 짧은 ECB의 경우 더욱 그렇다. 1999년 1월 유럽의 경제통화동맹(EMU)이 출범했다. ECB가 EMU의 통화정책을 전담하게 됐다. ECB의 임무는 처음부터 버거웠다. 유로화가 탄생하던 1999년 글로벌 금융시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1997년 아시아 다수 나라가 외환위기를 겪은 데 이어 이듬해 러시아가 국가부도 상황에 몰렸다.

1998년 8월 변동성지수(VIX)는 44%를 찍었다. 이후 수년간 25~30% 선에서 움직였다. 오늘날 VIX가 12%대인 점을 고려하면 당시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유로존 실업률이 줄어들고 있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10%에 육박하던 때였다. 1999년 전 기간 동안의 실업률은 현재의 9.3%보다 높았다.

통화정책 관점에서 보면 금융위기로 인한 디플레이션 위험에 대처할 필요성이 지금보다 훨씬 컸다. 유로존이 창설됐을 당시 물가상승률은 2% 이하에 머물렀다. 명목인플레이션은 1% 근처였다. 당시 그같은 통화정책 기본지표는 현재와 비슷했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상황은 지금과 비할 바 없이 나빴다.

1999년은 목표 인플레이션 달성에 실패하고 실업률은 높은 데다 금융시장도 출렁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ECB는 제로금리나 마이너스금리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첫 대응으로 목표금리를 2%로 고정시켰다. 이후 기준금리를 0.5%p 낮춰 1.5%를 유지했다. 당시만 해도 1.5% 기준금리는 전례없는 영역이었다. 실물경제에 숨통을 틔워주자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ECB는 몇달 뒤 방향을 전환했다. 99년말 금리를 다시 2%로 올렸다. 이듬해엔 3.75%로 다시 올렸다. 인플레이션이 목표치를 향해 움직이지 않았지만 ECB는 과감히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그때에 비하면 현재는 ECB에게 훨씬 긍정적인 환경이다. 인플레이션이 목표치 2%보다 낮다고는 하지만 노동시장은 수치상 훨씬 나아보이기 때문이다.

경제침체가 깊어지면 많은 실업자들이 아예 노동시장을 떠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구직활동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낙심한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을 떠난 것이라면, 현재 실업률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다고 믿는 건 오판일 것이다. 때문에 실업률과 경제활동 참가율과 함께 고려해야 제대로 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를 종합적으로 본다 해도, 지금의 유로존은 1999년보다 훨씬 상황이 낫다. 현재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당시보다 5%p 높다. EMU 창설 당시보다 현재의 구직자들이 더 큰 희망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대니얼 그로스는 "이러한 배경을 놓고 보면 현재의 ECB가 왜 마이너스금리와 양적완화 등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고집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물론 과거에 비해 장기 인플레이션 전망이 불확실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목표 인플레이션에 약간 미달한다고 해서 시장 펀더멘털이 훨씬 약했단 99년보다 2.5% 이상 기준금리를 낮추고 과거에 없던 막대한 양적완화를 지속해야 한다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정당화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같은 부조화가 유럽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미국 역시 20년 전과 현재를 비교하면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의 유사성이 존재한다. 1999년 핵심인플레이션은 대략 2%대였고, 실업률은 5%를 밑돌았다. 당시 연방준비제도(연준)는 기준금리를 5%로 유지했다. 하지만 현재 연준의 기준금리는 1.5% 아래다. 99년에 비해 최소 3.5%p 낮다. 게다가 막대한 규모의 양적완화로 연준 자산은 부풀대로 부푼 상태다. 이를 줄이는 과정을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일본의 인플레이션은 아시아 외환위기 때보다 오히려 높다. 실업률은 50년래 최저치다. 경제활동 참가율도 사상 최고치를 거듭 경신하고 있다. 그로스는 "그럼에도 일본은 미국이나 유럽처럼 마이너스금리와 양적완화 등 '돈키호테식 통화정책'을 지속하고 있다"며 "디플레이션이라는 허상의 적과 싸우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각국 중앙은행장들은 최근 모임에서 역동적인 글로벌 경제를 희망한다고 입을 모았지만 이는 중앙은행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라며 "남의 밭을 기웃거리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밭을 잘 가꿀 궁리를 해야 한다. 중앙은행들은 왜 관심사가 갑자기 바뀌었는지, 과거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은 아닌지 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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