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달러'(de-dollarization) 흐름 거스를 수 없다

2017-09-20 11:57:38 게재

미제스인스티튜트

새로운 기축통화가 언제 등장하고 낡은 기축통화가 퇴장하는지는 정밀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언론발표가 있는 것도, 국제회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조약이나 기념사진이 있을 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모든 기축통화는 어느 시점에 끝을 맞이한다는 사실이다.


한 기축통화에서 또 다른 기축통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언제나 금과 은이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는 알고 있다. 기축통화인 달러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글로벌 기축통화와 관련한 의문들은 주류 언론에서 보기 어렵다. 주류 경제학자 대다수도 그런 주제를 입에 올리기 싫어한다. 달러 이슈는 매우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리히텐슈타인 소재 '인크레멘툼AG' 매니징디렉터 겸 펀드매니저인 로날드-페터 슈퇴펠레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뉴스블로그인 '미제스인스티튜트' 기고문에서 "탈-달러(de-dollarization)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오늘날의 달러 체제가 의지하는 메커니즘은 익히 알려진 페트로달러(석유달러)다. 1970년대 중반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비공식 계약에 근거한 것이다.

결론은 단순했다. 석유를 비롯해 모든 주요 원자재를 미 달러로만 거래한다는 것이었다. 산유국과 석유업자는 페트로달러를 받아 미국채에 투자한다. 달러가 미국채로 순환하면서 미국은 현재 약 20조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지게 됐다. 그럼에도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 금융안정성을 자랑한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오랜 기간 글로벌 통화시스템이 의존하던 페트로달러 수립과정에 대한 주류 언론의 보도는 빈약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31일(현지시간)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페트로달러 기본 프레임은 매우 단순했다.

블룸버그는 미 정보자유법(FIA)에 따라 풀린 '74년 7월 미국과 사우디의 전보문 녹취록'을 입수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사우디에서 원유를 수입하고 사우디에 군사보호와 시설을 제공한다. 사우디는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채를 구입해 미 행정부를 돕는다는 것이었다. 세부내역 조율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협상 말미 작지만 중요한 걸림돌이 남았다. 당시 사우디의 파이살 국왕은 미 협상팀에 "우리가 미국채를 구입한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쳐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한 해 전인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4차 중동전쟁으로 사우디 내 미국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은밀히 지원하는 상황에서 사우디가 오히려 미국 행정부 재정에 도움을 주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반역적 행위라는 여론이 형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우디의 요구는 수용됐고, 사우디의 미국채 구입 여부와 액수는 40여년 극비사항이었다.

슈퇴펠레는 "페트로달러 형성과정이 주류 언론에서 상세히 보도됐다는 사실 자체가 글로벌 통화시스템의 전환이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지적했다.

탈-달러(de-dollarization) 흐름은 보다 명확해지고 있다. 1974년 이후 달러 체제는 관례적인 달러화 요구에 기반했다.

이제 많은 나라가 관례를 버리고 달러체제의 대안을 찾고 있다. 주요 산유국들과 최대 수입국이 미국채 축적을 중단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양자무역에서 자국 통화를 사용한다. 또 멀리 보면 1999년 유로화 출범도 비슷한 사례다. 유럽 각국은 달러가 아닌 유럽의 통화를 사용하고 있다.

다양한 나라가 달러의 지배적 지위에 도전해왔다. 일부는 시작부터 미국의 개입으로 좌절됐다. 달러 대신 유로화로 석유를 결제하려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아프리카 공동의 금 기반 통화를 만들려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대표적 사례다.

덜 알려지긴 했지만, 지표 아래 흥미로운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우디와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등 중동 산유국들이 지역통화동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새롭게 계획된 통화는 '걸포'(gulfo)로 불렸다. 텔레그래프는 2009년 12월 15일 기사에서 "걸포 프로젝트는 유럽통화동맹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아랍 세계는 유로화를 대단히 성공한 사례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바레인 '걸프원' 투자은행 CEO인 나헤드 타헤르는 당시 "미국 달러는 실패했다"며 "우리는 달러와의 연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야심찬 계획은 거듭 지연됐다. 2013년 중반 통화동맹 추진국들은 성명서를 내 "늦어도 2015년까지 아랍 공동의 통화를 출범시킬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현재는 더 이상 논의조차 안되고 있다. 게다가 통화동맹에 가입할 유력 회원국으로 꼽혔던 아랍에미리트와 오만 등은 합류하지 못했다. 하지만 달러의 역할에 공식적 이의를 제기한 모임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관심의 끈을 늦추기 어렵다.

그보다 상대적으로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는 사우디의 달러연동제 폐지다. 올해 4월 레바논 경제학자이자 전 경제부장관이었던 나세르 사이디는 중동국가들에게 '뉴노멀'(새로운 표준)을 제안했다. 중동 산유국들이 자국 통화를 달러가치에 연동시켜 놓은 것을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2025년 세계 경제의 중심은 아시아로 옮겨갈 것"이라며 "지난 20여년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정치적, 경제적, 금융적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산유국, 특히 여전히 페트로달러의 핵심인 사우디의 역할이 무시돼선 안된다. 하지만 현재 탈달러 흐름은 중국과 러시아가 이끌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의 금 축적과 생산은 잘 알려져 있다. 현재는 기축통화의 전환기로, 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공동의 인식을 하고 있다. 러시아 총리이자 전 대통령이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지난 2008년 이탈리아 아퀼라에서 열린 선진 8개국 모임(G8)에서 금 주화를 카메라 앞에 들어보이며 "각국 정상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늘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흐른 올 3월 러시아 중앙은행은 중국 베이징에 첫 번째 사무소를 열었다. 러시아는 위안화 표시 국채 발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양국은 최근 수년 동안 양자교역에서 달러 대신 루블화와 위안화를 사용하고 있다. 금 축적과 생산은 양국 모두 최우선 과제로 등장했다. 중국은 금선물로 전환가능한 원유선물 계약 출시를 준비중이다.

달러로부터 점진적으로 탈피해 다극 통화체제로 이동하는 추세는 확실해 보인다. 2014년 이후 미국채의 최다 보유국인 중국과 사우디가 더 이상 미국채 매입에 공을 들이지 않고 있다. 이란과 베네수엘라 등 주요 산유국 역시 자국이 벌어들이는 돈을 페트로달러체제로 순환시키는 데 관심이 없다. 슈퇴펠레는 "주류 언론에서 확신하는 것과 반대로, 대부분 산유국들은 달러표시 국제유가가 오르는 데 큰 관심이 없다"며 "오히려 자국 원유의 시장점유율에 훨씬 많은 관심을 쏟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탈달러 과정은 유럽에서 시작됐고, 중국과 러시아로 급격한 추동력을 얻고 있다. 이제는 멈출 수 없는 흐름이 됐다"며 "이런 상황에서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 초국적 기축자산으로 인식되는 금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커질 전망"이라고 주장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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