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지배자(전 세계 중앙은행)여, 너의 무능을 고백하라'

2017-10-12 11:13:51 게재

FT, 고장난 거시경제학 모델 집착하는 중앙은행 비판

약 10년 전 중앙은행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월가 공룡들을 제압하고 지구상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중앙은행은 금융위기로부터 세계 경제를 구했다. 값싼 돈을 쏟아부으면서다. 중앙은행의 강력한 힘으로 은행들은 다시 대출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중앙은행의 완화적 통화정책은 자산가격을 올리고 기업과 가계의 자신감을 높였다. 금융시장과 사람들은 중앙은행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중앙은행은 그럴수록 더 없이 취약해지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11일자로 진단했다.


전 세계 중앙은행 수장들은 13~15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에 참석한다. 하지만 이 자리는 중앙은행 대한 불신감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FT는 "중앙은행들의 경제예측 모델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며 "이들이 금리와 경제에 대한 통화정책의 영향을 과연 이해나 하고 있는지 짙은 회의감이 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즉 월가 공룡을 타도하고 등극한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들이 현대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FT는 "그런 상태에서 추진되는 통화정책은 실물경제에 치명적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앙은행의 능력은 경제성장률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선진국 민주주의를 건강히 지키는 데도 핵심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 선진국은 포퓰리즘의 저항에 시달리고 있다. 중앙은행의 능력에 회의감이 제기되는 이유다.

영국중앙은행 통화정책위원을 지낸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소장 애덤 포즌은 FT에 "인플레이션을 다시 올리지 못한다면, 앞으로 많은 문제가 생길 것"이라며 "임금상승 없는 정치적 안정성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현재 통화정책을 둘러싼 불안정성의 근원은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 중앙은행의 경제모델이 예측한 대로 인플레이션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도 디플레이션은 현실화하지 않았다. 세계 경제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광범위하고 강력한 상승세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선진국 전반에서 실업률이 떨어지고 있지만 인플레이션 압력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선진국 평균 실업률은 2009년 9%에서 현재는 6% 정도로 안정됐다. 그럼에도 임금상승률은 연 2% 수준에서 맴도는 형편이다. 노동시장에 물가와 실업률의 정상적 역관계를 보여주는 '필립스곡선'이 무너진 것이다.


월가공룡 제치고 등극한 중앙은행

중앙은행의 예측이 거듭 실패하면서 일각에서 솔직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인 재닛 옐런이 상대적으로 솔직하다. 그는 지난달 "인플레이션을 이해하는 연준의 분석틀 일부가 근본적으로 잘못 됐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옐런 의장의 인식은 공감대를 얻고 있다.

영국중앙은행 총재인 마크 카니는 "세계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했고,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마리오 드라기는 여전히 필립스곡선의 유효성을 믿고 있다고 언급하면서도 "지속적인 경제확장이 더 강한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전환되지 않고 있다"고 인정했다.

국제결제은행(BIS)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클라우디오 보리오는 "누군가 솔직해진다면, '중앙은행이 진정 인플레이션 프로세스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거시경제학 모델을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정말로 복잡하다. 하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경제주기와 인플레이션의 관계, 즉 앞서 말한 '필립스곡선'이 핵심이다. 경제주기는 실업률, 경제성장률 또는 기타 변수로 측정될 수 있다. 거시경제학 모델은 경제가 확장되면, 즉 실업률이 장기적 지속가능한 수준 이하로 떨어지거나 경제성장이 제한속도보다 빨라지면, 인플레이션은 오른다고 예측한다.

이 모델은 인플레이션 기대감이라는 개념으로 강화된다. 실제 인플레이션을 중앙은행의 목표에 근접하도록 만드는 게 바로 그 기대감이다. 일시적 편차가 있겠지만, 결국은 중앙은행이 예측한 대로 인플레이션이 움직일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는다면 실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현재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대개 2%에 목표치를 맞춰놓고 있다.

따라서 거시경제학 모델에서 가격 움직임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제가 인플레이션 없이 성장할 여지가 어느 정도냐 △사람들의 인플레이션을 어느 정도로 기대하느냐이다. 전자는 전문용어로 '느슨함'(slack), 또는 '생산간극'(output gap)이라 부른다.

이 모델에서 중앙은행 역할은 단기금리를 설정하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게 설정하면 가계와 기업은 저축보다는 소비와 투자를 하게 된다. 이는 단기적으로 경제를 부양하는 결과를 낳는다. 반대로 고금리는 수요(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킨다.

BIS의 보리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이 모델의 첫 번째 문제점은 국내적 '느슨함'과 인플레이션 사이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적어도 지난 20여년간 파악하기 어려워졌다는 게 증명됐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실업률은 1970년대와 80년대 호황기 시절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0%에서 맴돌고 있다. 영국의 경우 2010년 이후 실업률이 절반으로 줄었지만, 임금성장률은 연 평균 2%에 묶여 있다.

하지만 많은 경제학자와 중앙은행장들은 필립스곡선을 확고히 지지하고 있다. 예측에 거듭 실패하는 이론을 폐기하는 대신 약간 수정하는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각자의 설명이 다르긴 하지만, 전 세계 중앙은행 모두가 그같은 대증요법에 매달리고 있다.

연준의 옐런 의장은 인플레이션 측정에 약간 문제가 있다고, 이동통신 서비스 가격의 큰 폭 하락 등 일부 품목의 가격에 이해 못 할 변화가 있다고 설명한다. ECB는 '수퍼코어인플레이션'(super core inflation)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끄집어내 자신의 경제모델을 감싸고 있다. 하지만 그같이 눈물겨운 노력에도 물가 목표 달성에 행복해 하는 주요국 중앙은행은 거의 없다.

중앙은행들의 두 번째 변명은 실업률 수준이다. 안정적 인플레이션과 조화되는 실업률이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3년 영국중앙은행은 실업률이 7% 이하로 떨어지면 임금과 인플레이션이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이제는 4.5% 이하로 떨어져야 그럴 것이라고 수정했다. 당초 판단과 달리 경제 내에 보다 많은 '느슨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8년간 연준 이사로 재직했던 대니얼 타룰로는 그같은 설명의 문제점에 대해, "만약 중앙은행이 지속가능한 실업률의 수준을 계속 바꾼다면, 건전한 추정과 판단이 지레짐작과 다를 게 뭐냐"고 꼬집었다.

세 번째 해명은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기대감을 묶어두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가격을 더 빨리 올리려 하지 않고, 노동자들은 구할 일자리가 많음에도 더 이상 임금인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측면을 보여주듯, ECB 드라기 총재는 최근 임금협상을 하는 노조들에게 '과거의 인플레이션을 참고하지 말라'고 촉구해 눈길을 끌었다. 중앙은행장의 발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성격이었다.

타룰로 전 이사는 "내가 연준에 있을 때, 인플레이션 기대감이 통화정책에서 지나치게 많은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며 "인플레이션 기대감은 깊이와 범위 등 답이 없는 질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일본중앙은행은 기업들이 임금을 올려주기보다 노동자의 근무시간을 줄여 생산성을 높이는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인플레이션을 높이지 않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입장에서 경제주기와 인플레이션의 관계가 깨진 것이 첫 번째 문제라면, 두 번째 문제는 자연이자율이 전 세계 전반적으로 지속 하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이자율이란 저축과 투자의 균형을 만드는 장기적 금리 수준을 말한다.

부채급증 악영향만 낸 저금리

연준은 지난 5년 동안 자연이자율의 수준이 2%에서 0.75%로 대폭 감소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FT는 "하지만 이는 지레짐작과 다를 바 없다"며 "옐런 의장 본인이 자연이자율 가치는 그 어떤 순간에도 정확히 측정되고나 예측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자연이자율 하락의 이유를 더 많은 저축을 부르는 노령화 추세나 전 세계적 과잉저축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이유가 어찌됐든 연준의 전 의장 벤 버냉키는 "저금리가 더 이상 예전만큼의 효과를 낼 수 없다"며 "중앙은행이 처방하고자 하는 약의 효과를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FT는 "필립스곡선의 붕괴와 자연이자율 하락이라는 문제가 결합하면서 이제 중앙은행들은 실물경제에 필요한 게 부양책인지, 냉각수인지를 쉽게 결정할 수 없게 됐다"며 "또한 통화정책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지 여부도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중앙은행의 근본적 이론 모델이 잘못됐고, 따라서 이를 약간씩 수정하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타룰로 전 이사는 "본질적으로 중앙은행은 자신이 모르는 일, 측정할 수 없는 일, 사실이 확인되고 나서야 추론가능한 일에 대해 정책을 짜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중앙은행들이 명확한 증거가 없는 거시경제학 모델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지난달 영국중앙은행 독립 20주년 기념식에서 UC버클리대 경제학 교수인 크리스티나 로머는 "중앙은행의 모델에 어떠한 결함이 있는지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며 "연구결과 중앙은행이 경제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따라서 바뀔 필요가 있다고 판명나면 중앙은행들은 그같은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앙은행에 대한 가장 공격적인 비판자는 BIS의 보리오 수석 이코노미스트다. 그는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동력을, 인플레이션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글로벌화로 인한 무역 통합과 기술의 급격한 발달이 기업과 가계의 가격결정권 부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국내적 느슨함'보다 더욱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인플레이션 프로세스가 예전 소비에트연방과 중국이 글로벌 경제에 편입된 상황으로부터, 기타 개발도상국과 신흥국이 경제를 개방하는 상황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는 게 합리적인가"라며 중앙은행들의 거시경제학 모델을 비판했다.

보리오는 "중앙은행들이 저금리를 유지하면서 인플레이션과 실물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됐다"며 "유일한 효과는 가파른 부채의 증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경제적 파괴를 일으키지 않고 금리를 올리는 일이 어려워졌다"며 "막대한 부채와 금융주기가 만들어낸 실물경제의 왜곡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FT는 "물론 보리오의 견해가 지배적인 관점은 아니다"면서도 "하지만 이를 더이상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지적했다. 옐런 의장은 부채문제에 대한 걱정에 동조하며 인플레이션이 목표에 비해 낮더라도 지속적으로 금리를 올려나가겠다는 의지를 계속 천명하고 있는 이유다.

FT는 "중앙은행들은 지난 10년 간 글로벌 경제를 이끌기에 충분한 신뢰를 받아왔다"며 "따라서 중앙은행조차 자신의 경제모델과 정책, 수단 등에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이는 대단한 충격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BNP파리바의 선임 이코노미스트인 리처드 바웰은 "중앙은행이 얼마나 무지한지에 대해 이제 고백을 해야 할 때"라며 "가족을 태우고 운전대를 잡은 아빠가 내리막길을 주행하는 도중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나만 믿고 따르라'고 말하는 바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FT는 "대중들은 여전히 중앙은행에 신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같은 신뢰는 덧없는 것"이라며 "중앙은행은 지난 10년간 지구의 지배자였다. 중앙은행은 이전의 지배자인 월가 공룡을 몰아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명심해야 한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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