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시장에 '퍼펙트스톰(동시다발 악재로 인한 초대형 위기)' 닥친다"

2018-01-24 11:03:28 게재

국제결제은행 전 수석이코노미스트 경고

전 세계 금융시스템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만큼 위험한 상황이지만, 이를 대처해야 할 금융당국들이 방어책이 거의 없는 '정책의 덫'(policy trap)에 빠져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1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트레이더들. 사진 연합뉴스


23일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국제결제은행(BIS)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지내다 현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심의위원장을 맡고 있는 윌리엄 화이트는 "지난 9년 동안 각국 중앙은행들이 위기극복을 위한 비상자금을 풀었지만 신흥국을 부채의존병에 걸리게 하는 등 왜곡된 효과만 냈다"며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구조적 병폐를 고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금융시장의 모든 지표는 리먼브러더스의 몰락 직전의 상황을 가리키고 있다"며 "하지만 그때의 교훈을 망각했다"고 덧붙였다.

화이트 위원장은 신용악화의 증거가 매일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사례로 영국 2위 건설업체 카릴리언의 파산을 들었다. 카릴리언은 독일 사채시장(Schuldschein bonds)을 통해 은밀하게 1억9500만달러를 빌렸다가 빚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됐다.

원래 독일 사채시장은 가족경영 중심의 중소기업(미텔슈탄트)에게 안정적 대출을 하는 시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변방이었던 이곳이 고위험 그림자금융 시장으로 변모했다. 다른 채권시장과 달리 자격요건이 느슨해 발행부담이 적은 곳이다. 신용평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2011~2017년 미평가 채권발행 비중이 70~80%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당초 독일 중소기업의 전유물이었지만 2016년엔 해외 발행자 비중이 40%가량으로 치솟았다. 양적완화와 마이너스금리제가 대출시스템을 얼마나 왜곡시켰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화이트 위원장은 "지속불가능한 모든 금융거품의 최상단엔 중독성 짙은 낙관주의가 자리한다"며 "사람들은 위험이 줄어들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하지만 그때가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는 때"라고 지적했다. 2007년 폭풍전야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 금융스트레스 지수도 극히 낮은 상태로 억눌려 있다.

하지만 이번엔 더욱 고약한 상황까지 겹쳤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 GDP 대비 정부·가계·비금융기업 부채 비율은 327%로 역대 최고다.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51% 더 치솟았다.

이는 경제사에서 새로운 현상이라는 지적이다. 서구 중앙은행들이 풀어놓은 막대한 양적완화 유동성이 동아시아와 중남미, 기타 신흥국으로 흘러들어갔다. 화이트 위원장은 "중앙은행들은 불을 키우기 위해 계속 기름을 쏟아붓고 있다"며 "그러면서 금융시스템이 안정화됐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를 거둬들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며 "금융시장은 보다 조심스러워야 했다. 너무 많은 금이 가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제약회사들은 신약을 출시하기 전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임상실험을 한다"며 "하지만 중앙은행들은 부작용에 대한 별 다른 고려 없이 막대한 결과를 초래할 양적완화 실험을 강행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지난해 말부터 매달 100억달러 규모씩 양적완화를 거둬들이고 있다. 올해 감축 규모를 계속 늘린다. 10월부터는 매달 500억달러씩 줄인다. 시장에 공급되는 미 국채 규모가 치솟게 된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대규모 감세안을 시행하고 각종 인프라 건설 예산을 집행하면서 미 정부 적자가 1조달러를 향해 가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보유중인 미 국채를 줄여가고 있다.

텔레그래프는 "악재가 겹쳐 초대형 위기를 부르는 '퍼펙트스톰'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전 세계 돈값의 벤치마크 기능을 하는 1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이 신용시장에 커다란 충격을 줄 정도로 치솟을 것"이라고 전했다.

증시와 자산시장의 거품은 '금리가 바닥을 유지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최근 미국 재무부 산하 독립부서인 금융조사국(OFR)이 발행한 금융안정성보고서에 따르면 금리가 100bp(1%p) 오르면 미국 채권시장에서 1조2000억달러가 사라진다. 정크본드와 고정금리형 모기지, 파생상품 등에는 그 이상의 충격이 미친다.

전 세계에 뿌려지는 낙진은 파괴적이다. 미국 밖에서 발행되는 달러 표시 부채는 지난 15년 간 5배 올라 10조달러를 넘었다. 화이트 위원장은 "이는 매우 막대한 금액이다. 조만간 많은 사람들이 달러 표시 부채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채무자들은 금리는 물론 달러가치 상승으로 이중고를 겪게 된다.

그동안 인플레이션은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 주기가 변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특히 주식과 원자재, 채권 등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한쪽에서의 손실을 다른 쪽에서 만회할 수 있도록 설계한 '리스크패리티'(위험균형) 펀드가 관심사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장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안정적 수익을 돌려준다는 이 펀드에 많은 돈이 몰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식 원자재 채권이 완전히 독립적인 시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식과 채권이 동시에 떨어질 때 시장의 충격이 두 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2013년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이 금리인상을 시사했을 때 주식과 채권값이 모두 급락하며 그해 리스크패리티 펀드는 4%대 손실을 입었다.

전문가들은 부쩍 커진 규모의 펀드가 충격을 받으면 주식과 원자재 시장에까지 부정적 영향이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채권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대부분 펀드들은 차입금으로 채권에 투자한다. 채권 손실이 커지면 펀드매니저는 차입금을 갚기 위해 보유 주식과 원자재를 팔아야 한다. 그러면 주식과 원자재 시장으로 매도세가 확대된다.

RBI캐피털은 투자자에 발송한 편지에서 "리스크패리티 펀드가 '유동성 붕괴'(liquidity crash)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도이체방크는 고객들에게 올 6월 기준으로 S&P500에 대한 '풋옵션'(미리 정한 가격에 팔 수 있는 권리)을 설정해 시장급락 위험을 헤지하라고 조언했다. 증시 상승세가 너무 오래 지속됐고, 리스크패리티 펀드가 시장조정 수준을 증폭시킬 것이라는 이유다.

인플레이션 주기가 진짜로 바뀌는지, 그리고 얼마나 급속히 바뀌는지가 여전히 활황세인 금융시장에 최대 관심사다. 확실한 건 미국의 '아웃풋 갭'(output gap, 실질 성장률과 잠재 성장률의 차이)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또 '공급능력 제약'(capacity constraints) 지점에 다다르고 있다.

지난 30년 간은 디스인플레이션(물가상승률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의 시대였다. 이는 본질적으로 공급측면의 충격(supply shock) 덕분이었다. 중국의 경제개방과 베를린 장벽 해체로 8억명의 노동자가 글로벌 시장에 새로 등장했다. 임금을 내리 눌렀고 값싼 재화를 시장에 쏟아냈다. 여기에다 디지털기술의 발전으로 '아마존 효과'도 발휘됐다. 또 베이비붐 세대가 경제의 주축이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저축과잉을 부르는 한 요인이 됐다.

하지만 종종 간과하기 쉬운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중앙은행들이 각 경제사이클에 멋대로 개입하면서 호황기를 지속시키고 불황에 대비하기 위해 부양책을 주입했다. BIS는 "그 결과 마땅히 사라져야 할 좀비기업들을 연명시키면서 창조적 파괴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과정을 방해했다"고 지적했다.

화이트 위원장은 "이제 모든 게 반전의 흐름을 타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점차 사라지고, 중국의 노동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금리가 오르면서 좀비기업들은 마침내 호흡기를 떼게 됐다"고 말했다.

글로벌 경제 상황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오를 필요가 있다. 인플레이션이 오르면 명목 GDP 성장세를 끌어올리고, 부채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문제는 금리인상의 충격이 그보다 먼저 닥칠 것이라는 점이다.

중앙은행들은 현재 '부채의 늪'에 빠졌다. 인플레이션 상승 압력이 거센 상황에서 제로금리를 유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준금리를 올리자니 금융시스템 전반을 박살낼 우려가 있어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다. 화이트 위원장은 "솔직히 말해 너무 두렵다"고 말했다.

중앙은행들이 아직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현재까지의 통화정책은 매우 큰 위험을 배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중앙은행 통화정책에 너무 민감해졌다. 다가올 경기침체에 대응하려면 중앙은행들은 최소 400~500bp(4~5%p) 정도 금리인하 여지를 가질 수 있도록 통화적 충격완충재를 쌓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중앙은행의 정책은 향후 경제침체를 촉발하는 방아쇠가 될 수밖에 없다.

화이트 위원장은 "중앙은행의 위기대처 총알이 고갈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범람이라는 긍정적 변수도 모두 고갈했다"며 "어느 순간 채무불이행 사태가 속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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