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 계기로 성폭력 없는 사회를 ③

'미투'도 외치지 못하는 인권약자들 '수두룩'

2018-03-05 10:18:48 게재

이주여성노동자 12% 성폭력 피해 호소 … "한때 관심으로 끝나면 안돼, 시민의식 함께 변화해야"

'미투(#me too, 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사과, 각종 협·단체들의 후속 조치와 미투 지지 성명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문화예술계를 포함한 한국 사회 전반의 시스템과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사회적 관심이 사라진 이후 같은 사태가 되풀이될 수도 있다. 내일신문은 미투 운동을 지지하며 문화예술계를 비롯해 사회 각 분야 변화의 필요성을 짚는다.

<편집자주>


미투 운동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아직도 말조차 꺼낼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고용주와 노동자 등 권력형 관계에 놓여있고 사회적 약자인 이주여성노동자들에게 미투 운동은 먼 나라 얘기일 수밖에 없다. 어디 이들 뿐이랴. 계약직 특수고용직 등 이른바 '을'의 위치에 있는 수많은 약자들은 오늘도 직장이나 사회에서 홀로 울음을 삭히고 있다.

 

"미투, 끝까지 함께 합니다"│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2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투 지원본부'를 발족해 피해자 지원과 각종 법·제도 개선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김아영 기자

 


추방당할까봐, 한국말 못해 등 적극적 대응 불가능 = 최근 공익인권법재단 공감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등의 '이주여성 농업노동자의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12.4%가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답했다.

연령대별로는 20대 피해자가 가장 많았다. 가해자 상당수가 한국인 고용주였다. 피해자 중 64.0%가 한국인 고용주 또는 관리자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밝혔다. 이 조사는 2016년 6~10월 서울 대구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등에 거주하는 이주여성 농업노동자 202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조사 방식은 설문조사와 심층면접 등으로 이뤄졌다. 출신국가는 캄보디아 75.2%(152명), 베트남 24.8%(50명)이다. 연령별로는 20~30대가 89.6%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어 능력(읽기·말하기)이 보통이거나 못하는 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성폭력 피해자들 상당수가 제대로 된 대응법을 모르는 현실이다. 피해자들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한국말을 잘 못해서'(68.4%, 복수응답)였다. 또한 '어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몰라서' 52.6%,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42.1%, '일터에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15.8%, '가해자가 두려워서' 10.5%, '한국에서 추방당할까봐' 5.3% 등의 이유를 꼽았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체류 문제 등으로 성범죄 노출 위험을 겪고 있는 이주여성들을 위한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당장 법과 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노력 뿐만 아니라 인권 약자들이 실제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국회 차원에서 다양한 채널들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일수록 취약, 성별 대결 양상으로 가면 안돼 = 이 같은 문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직장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성폭력 문제 본질이 성차별이나 남녀관계보다 '권력관계'에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력관계에서 취약할수록 성폭력 피해자가 될 확률이 높았고 반면 피해를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이었다.

실제로 여가부의 '2015년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반직원'(6.9%)과 '비정규직'(8.4%)이 '관리직'(4.6%)과 '정규직'(6.4%)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성희롱 피해를 호소했다. 이는 상시근로자 50인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전국의 공공기관과 민간사업체에 종사하고 있는 일반직원 및 성희롱 업무담당자 9200명을 대상으로 2015년 8~11월 설문 조사한 결과다. 정부 차원의 성희롱 실태조사는 3년 단위로 실시하고 있다.

성희롱 피해에 대해서 이들 역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희롱 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 중 78.4%가 성희롱 피해에 대처하지 않고 '참고 넘어갔다'고 말했다. 대처했다는 응답자들 중에서도 '개인적 처리'(6.8%)와 '상급자/동료와의 면담'(4.7%) 등의 개인적 대응이 대부분이었고 성희롱 피해에 '사내기구'와 '외부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처리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0.9%에 불과했다.

참고 넘어간 이유는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48.2%, 복수응답)라는 응답이 많았다. '업무 및 인사고과 등의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되어서'(16.2%)와 '소문 평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15.4%) 등의 이유도 있었다.

성희롱 예방교육 효과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성희롱에 취약한 이들의 반응이 부정적이었다. '일반직원'(3.93점)에 비해 '관리직'(4.06점)이, 그리고 민간사업체의 경우 규모가 클수록 성희롱 방지효과에 대해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성희롱 사건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집단('여성' '20~30대' '일반 직원' '소규모 사업체' 종사자)이 성희롱 교육의 효과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결과다.

변혜정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은 "미투 운동을 계기로 유명인들은 가해 사실만 알려져도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등 당장 법적인 처벌 없이도 일정 부분 제약을 둘 수 있지만 이주여성노동자 등 인권 약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성폭력 문제가 단순히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약자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잘못된 권력 관계를 바로 잡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는 특정 '성'이 아닌 누구나가 될 수 있다"며 "단순히 법과 제도만으로 바뀔 수가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시민의식 변화가 함께 이뤄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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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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