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의 '금태환 중단'과 트럼프발 '무역전쟁'

2018-07-03 11:41:57 게재

미 전략경제학자 F. 윌리엄 엥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무역전쟁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 이란, 베네수엘라 등 적국은 물론 유럽연합(EU) 회원국 등 동맹국들에게도 포화를 날리고 있다. 1970년대도 지금과 상황이 비슷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의 전략 경제학자인 F. 윌리엄 엥달은 2일 개인 홈페에지에 "미국은 50년 전부터 무역상대국에게 경제적 불안감을 무기로 협박하는 전략을 구사했다"며 "다른 게 있다면 현재의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인 '트윗'을 사용해 상대국을 심란케 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엥달에 따르면 대략 반세기 전인 1971년 8월 15일부터 미국 정치권과 월가 금융권은 전 세계에 인플레이션된 종이달러를 강제로 떠안겨 금융거품과 감당할 수 없는 부채의 증가를 일으킨 뒤 결국 무너지게 만드는 전략을 쓰고 있다.

그는 "트럼프발 무역전쟁을 이해하는 주요 관전포인트는 사실 무역에 관한 것이 아니다"라며 "즉, 상대국과 무역이나 환율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게 가능한 단계는 1971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에 의해 영영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미 달러와 중국 위안화, 유로화, 영국 파운드화, 일본 엔화 등 각국 지폐가 한데 놓여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1년 이후 미국 경제는 금융매출을 원천으로 하는 나라로 바뀌었다. 산업재를 생산하는 나라에서 모든 투자의 목표가 '돈 놓고 돈을 먹는' 데 있는 나라가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너럴모터스(GM)다. GM은 1960년대 말 전 세계 가장 많은 승용차와 트럭을 만들던 회사였다. 미국 경제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자동차대출금융 자회사인 GMAC(현 앨라이파이낸셜의 전신)를 만들면서 산업이 아닌 금융에 빠져들었다. 카지노를 즐기듯 전 세계 경제를 상대로 판돈을 걸었다. 2007년 3월 미국 부동산거품이 폭발하면서 GM은 파산, 사실상 국영화됐다. 월가 거대 은행들도 국민 세금과 연준의 뒷돈으로 구제금융을 받았다.

이런 과정은 수십년에 걸쳐 일어났다. 2000년대 월가 은행들과 투자펀드들은 사실상 미국 경제를 장악했다. 제조업 일자리는 '외주화'라는 명목으로 해외로 옮겨졌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이나 독일 등 탐욕스런 도둑에 의한 게 아니다. 바로 월가 은행들의 강한 압박 때문이었다. 월가 은행들은 기업들에게 '오직 주가에 신경 쓸 것'을 주문했다. 제품의 질과 내구성은 월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차입매수'(Leveraged Buyout)나 '주주가치'(Shareholder Value) 등 어려운 용어가 쉽게 쓰이게 됐다. '돈을 빌려라' '주가를 높여라'를 포장한 단어들이었다.

월가 은행들은 만족할 만한 금융투자수익을 내지 못한 기업의 경영진을 수시로 해고했다. 오늘날 미국에 남은 것은 서비스 경제, 빚으로 부풀려진 소비자 경제다.

엥달은 "더 이상 미국은 산업 선도국이 아니다"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벌이는 경제와 무역에 대한 선전포고는 1970년대 이전에 가능했던 것을 반세기 뒤에 되풀이하는 자포자기의 외침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산업 선도국에서 부채에 의존한 금융제국으로

미국은 한때 위대한 산업 경제국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파괴적인 전환기를 거치면서 변했다. 그같은 변화에는 배경이 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케인스주의 경제학파는 국가의 재정지출이 불경기나 경기침체를 완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케인스학파는 존 록펠러 3세가 '제2차 아메리카 독립혁명'이라는 저서에서 주장한 탈규제 정책, 가스 수도 고속도로 등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책에 자리를 내줘야 했다.

동시에 자유시장을 부르짖은 사상가들이 케인스학파를 굴복시켰다. 시카고대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나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 자유주의 경제학파들은 월가는 물론 록펠러 가문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특히 프리드먼 교수는 자유시장 경제학의 대표 권위자로 군림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의 정책을 뒷받침했다. 그의 자유시장 이론은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중심 노선이 됐다. 중남미 전역,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의 소속국가, 동유럽국가 등에 경제적 충격요법과 탈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활용되기도 했다.

닉슨 대통령의 무역 워게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금과 달러의 태환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자본주의 경제는 거대한 전환기를 맞게 됐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233조달러의 부채가 만들어지게 된 근본 원인이다. 빚의 대부분은 달러 표시 부채다.

그보다 앞서 미국 행정부는 의회에 징벌적 무역제한조치를 부과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주요 교역국인 일본과 유럽경제공동체(EEC) 소속 동맹국들, 그중에서도 특히 독일과 프랑스가 대상이었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과 EEC 소속 나라들이 전후 폐허를 딛고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첨단기술로 무장해 미국을 빠르게 뒤쫓았다. 반면 당시 미국의 제철소와 자동차 제조공장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품질이 뛰어난 독일과 프랑스의 수출품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높았다.

그 결과 독일과 프랑스 일본 내에 막대한 달러가 쌓이기 시작했다. 1971년 미국이 해외에 진 달러 부채가 약 610억달러에 달했다. 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라 달러와 금의 태환을 요구할 경우 미국은 언제든 응해야 했다. 1971년 초가 되자 연방준비제도(연준)에 보관된 금의 양이 250억달러에서 120억달러로 급감했다. 금태환 흐름이 눈덩이처럼 거세졌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된 달러가치를 우려하면서 금 바꾸기 열풍이 불었다. 미국 정부와 월가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금태환 조항을 미국의 글로벌 패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걸림돌'로 인식했다.

금과 달러

금태환 중단에 앞서 미국은 유럽 등 교역국에 의류와 신발 수입에 제한을 가하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겠다고 위협했다. 그 위협은 유럽에 자동차 등 미국 수출품 쿼터를 늘려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 미국의 무역정책은 현재 트럼프 행정부 정책과 사실상 유사했다. 1970년 5월 당시 미 재무부 차관이던 데이빗 케네디는 상대국들에 미국 수출 쿼터를 늘리라고 주문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미 의회에 수입품 쿼터를 제한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게 해 보복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당시 미 정부는 무역 불균형의 원인이 상대국에 있는 게 아니란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 기업들이 유럽과 아시아 기업을 무더기로 사들이면서 이들 기업에 단가를 후려쳐서라도 재무제표상 이익을 내도록 강제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미국 수출품이 더이상 유럽과 일본 제품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EEC 내 환율을 교란해 자중지란을 일으키기 위해 EEC 회원국인 독일에 민간 자본을 대거 유입시켰다. 미국은 과도하게 인플레이션된 달러의 가치를 낮추는 대신 EEC 회원국들에게 "통화가치를 올리라"고 요구했다. 상대국 수출품의 경쟁력을 깎아내리려 했던 것이다. 미국은 일본에 대해서도 엔화를 20% 평가절상하지 않으면 대미 수출품에 높은 관세를 물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당시 닉슨 행정부 상무장관인 모리스 스탠스는 유럽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보였다. 그는 "우리는 전 세계 나라들이 쉽사리 속이는 나라(Uncle Sucker)가 됐다"고 주장했다.

미국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은 "당시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 결투를 신청했다"며 "굴복하든지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보복하라"며 으르장을 놓았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 나라들은 미국의 요구에 순종했다. 미국의 주장은 한 마디로 '우리는 패권국으로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또는 그 어떤 법적합의에도 면제될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프랑스를 필두로 EEC 중앙은행들은 달러 잉여액을 서둘러 금으로 태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독일은 빠졌다. 분데스방크 총재 칼 블레싱은 미국의 압력을 받았다. 전례가 있었다. 1966년 독일 분데스방크가 점증하는 잉여달러를 금으로 태환하는 방안을 고려하려 하자, 미국은 블레싱 총재에게 "금을 태환할 경우 서독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금 태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당시 폴 볼커 재무차관의 협조를 받아 연준의 금태환 창구를 영원히 폐쇄한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닉슨 행정부는 EEC와 일본의 수입품에 대해 10%의 관세를 부과했다. 금으로 태환되지 않는 달러를 무제한 받아들이라는 시범적 위협이었다. 종잇조각에 불과한 달러의 명목가치는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금 태환 중단의 직접적 결과였다.

금 태환 중단 명령에 서명하면서 닉슨 대통령과 월가는 해외에서 발행하는 국채 한도를 풀어버릴 수 있었다. 미국의 부채는 치솟았고 미 정부와 월가는 오늘날의 달러패권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게 됐다. 동맹이나 적국이 미국의 요구에 옴짝달싹 못하도록 경제제재를 무기로 삼을 수 있게 됐다.

엥달은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독일이나 중국을 상대로 '환율 조작국'이라 칭하는 건 사실과 다른 주장"이라며 "197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적 협박은 외양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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