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턴우즈 체제는 무엇을 약속했었나

2018-09-10 10:59:32 게재

영국 가디언 '부의 불평등 확산' 역사 짚어

매년 1월이면 전 세계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스위스 다보스에 모여 세계경제포럼을 연다. 이에 맞춰 영국의 빈민구호단체인 '옥스팜'은 세계의 부자들이 한해 동안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는지 발표한다. 2016년 최상위 부자 62명의 재산이 세계인구 하위 절반의 재산과 같았다. 올해 그 숫자는 42명으로 줄어들었다.

옥스팜 보고서는 매년초 전 세계 언론들이 '부의 불평등'을 주제로 즐겨 보도하는 아이템이다. 하지만 더 이상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 갑부들이 더 많은 부를 거머쥐는 일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된 듯하다.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하지만 부가 집중되면 정치와 언론을 장악한다. 한때 민주주의를 구가하던 나라들이 금권정치에 자리를 내주고, 금권정치는 소수 독재정치에 자리를 내준다. 소수 독재정치는 결국 도둑들이 판을 치는 나라로 만든다.

하지만 언제는 이렇지는 않았다는 지적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정기 기고자이나 '머니랜드 : 도둑과 사기꾼이 지배하는 세상, 이를 다시 되찾는 방법'의 저자 올리버 불로프는 9일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흐름은 분명 지금과 달랐다.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커졌다. 점차 불평등이 개선되던 때였다"며 "그런 흐름이 바뀐 이유를 알려면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모여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던 2차 대전 막바지 미국 뉴햄프셔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불평등이 개선된 때도 있었다

불로프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자본은 국가간을 자유롭게 오갔다.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 자본 때문에 여러 나라의 환율과 경제가 불안정해졌다. 나라 경제는 무너지는데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졌다. 이같은 혼란이 이어지면서 독일 등의 나라에서 극단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경쟁적으로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하고 '근린궁핍화' 전략에 따라 상대국에 무거운 관세를 부과하며 무역전쟁을 벌였다. 결국 이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그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면 안된다는 데 뜻을 모았다. 1944년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 휴양지에서 국제통화금융회의가 열렸다. 나라들을 드나들며 이익을 챙기는 고삐풀린 자본을 영구히 통제하는 경제구조를 협상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시스템 아래서 모든 나라의 통화는 달러에 연동됐다. 달러는 금에 연동됐다. 1온스의 금은 35달러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정해졌다. 현재 가치로는 약 500달러 정도다. 미국 재무부는 국제 교역을 위해 충분한 달러를 공급함과 동시에 달러의 가치를 지키는 데 충분한 금을 보유하겠다고 약속했다.

투기꾼들이 이같은 고정환율제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국경간 자본 흐름은 엄격히 통제됐다. 자본은 해외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장기투자 목적으로만 가능했다. 상대국 통화나 채권에 대한 단기투자는 불가능했다.

불로프는 브레턴우즈 시스템을 유조선에 비유했다. 유조선에 1개의 기름탱크만 있다면 험난한 폭풍우를 만날 경우 배 전체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최악의 경우 배가 전복된다.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논의된 것은 각 나라가 기름을 나눠 싣는 작은 탱크 역할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 역시 파도에 따라 출렁이겠지만 각자의 격실에 한정된다. 배 전체를 위협하는 모멘텀을 얻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브레턴우즈 시스템의 특징을 묘사한 영화는 1964년 개봉한 '골드핑거'(Goldfinger)다. 007시리즈의 3번째 영화다. 악당 골드핑거가 각국이 보유한 금에 개입하면서 서구의 금융시스템을 망가뜨리려 한다는 내용이다.

극중 영국중앙은행 간부로 등장하는 커널 스미더스는 007에게 "금과 금이 보증하는 각국 통화는 국제 신용의 기반"이라며 "하지만 문제는 영국에서 1000파운드에 거래되는 골드바가 금붙이에 대한 수요가 높은 인도에서는 1700파운드로 거래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금을 나라 밖으로 옮겨 해외에서 팔면 많은 이문이 남는다.

악당 골드핑거의 계획은 영국 내 전당포를 포섭해 일반인들로부터 금붙이를 일제히 사들이는 것이다. 골드핑거는 모은 금붙이를 녹여 롤스로이스 차에 숨긴 뒤 스위스로 간다. 거기서 다시 골드바 형태로 가공한 뒤 인도로 날아간다. 그는 영국 통화와 경제를 망가뜨면서 막대한 돈을 번다. 영연방 독립국인 바하마에 500만파운드 골드바를 가진 숨은 부자가 된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골드핑거의 행위는 세금을 포탈한 죄밖에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가격으로 금을 사들였고, 그 금을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해외의 시장에서 팔았을 뿐이다. 그렇게 번 돈은 골드핑거의 돈이다. 무엇이 문제가 될까.

하지만 당초 브레턴우즈 체제는 지금과 달랐다. 당시 금은 골드핑거에 속하는 것은 물론 영국에도 속하는 것이었다. 즉 금을 소유한 개인만이 금의 주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르면 돈의 가치를 창출하고 보증하는 나라도 그 돈에 대한 권리를 가졌다. 각국 정부는 돈을 소유한 자들의 권리를 제한했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가장 주요한 관심사는 전쟁으로 치닫게 하는 불황과 세계대전의 재발을 막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제교역과 관련해 사회의 권리가 돈을 소유한 사람의 권리를 앞서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1980년대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는 매우 낯선 풍경이다. 시스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중국과 브라질 러시아 등에서 투자 이익의 냄새만 맡으면, 자본은 끊임없이 국경을 넘나든다. 지옥이라도 불사할 맹렬한 기세로 이동한다. 한 나라 통화의 가치가 부풀려졌다면, 투자자들은 그 약한 고리를 즉각 알아챈다. 힘이 빠진 고래 주위를 맴도는 상어떼처럼 일시에 덮친다.

전 세계적인 경제, 금융위기가 닥칠 때면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금이나 미국 국채로 몸을 숨겼다가 호황이 시작되면 수익을 찾아 쉴새 없이 옮겨다니며 전 세계 모든 주가를 부양한다. 유동성 자본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마음만 먹으면 기축통화국의 반열에 오른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정부를 굴복시킬 수 있다.

지난 수십년 간 유럽의 유로화, 러시아의 루블화, 영국의 파운드화가 투기세력의 공격에 무릎을 꿇었다. 이는 투기자본의 이동을 막기 위해 고안된 브레턴우즈 체제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돈의 주인' 싸움에서 국가는 왜 부자에게 굴복했나로 이어집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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