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주인' 싸움에서 국가는 왜 부자에게 굴복했나

2018-09-11 11:00:22 게재
'돈의 주인' 싸움에서 국가는 왜 부자에게 굴복했나로 이어집니다.

9일 '머니랜드 : 도둑과 사기꾼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 다시 되찾는 방법' 저자인 올리버 불로프의 가디언 기고문에 따르면 브레턴우즈 시스템은 놀랄 만큼 성공적이었다. 1950~60년대 주요 선진 국가의 경제는 거침없이 성장했다. 사회적 불평등은 대폭 완화됐다. 정부는 공적의료 체제와 사회기간시설 건설 등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물론 그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세금을 많이 걷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부자들은 과세당국의 감시를 피해 돈을 숨기려 애썼다. 당시 세계적 인기를 얻어가던 영국 록그룹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은 '택스맨'(Taxman)이라는 곡을 통해 높은 세금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에게 적용된 한계세율은 95%였다. 즉 일정 기준 이상으로 번 1파운드마다 0.95파운드의 세금을 내야 했다.

1944년 7월 국제통화금융회의가 열린 곳임을 홍보하는 미국 뉴햄프셔주 휴양지 브레턴우즈 '마운트 워싱턴 호텔' 앞의 입간판. 브레턴우즈 회의가 2차 대전 후 44개국 대표가 모인 20세기 가장 중요한 국제회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미국 뉴햄프셔주 홈페이지


높은 세금에 저항한 건 비틀즈뿐 아니었다. 록그룹 롤링스톤스는 세금을 피해 아예 프랑스로 본거지를 옮겼다. 베어링은행 가문의 손자이자 3대 크로머 백작, 1961~66년 영국중앙은행 총재였던 롤랜드 베어링도 63년 정부에 보내는 의견서에서 "자본의 이동을 통제하는 건 시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따라서 나는 윤리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당시 베어링 총재가 정부의 자본 통제를 반대한 이유 중 하나는 영국의 금융가인 '시티 오브 런던'(시티)이 고사 위기에 놓였기 때문. 영국 한 은행장은 "최고급 자동차를 시속 20마일(32킬로미터)로 몰라고 단속하는 격"이라며 "한때 꿈의 직장이었던 은행들이 마비됐다"고 말했다.

당시 은행원들은 늦게 출근해 일찍 퇴근했다. 점심엔 술판을 벌이며 시간을 낭비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았다. 은행이 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성공적 출발

최고급 마천루가 빼곡히 들어선 현대의 런던 금융가를 생각하면 시들시들 말라가던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50년대와 60년대 '시티'는 국가적 사업에 별 발언권이 없었다. 사회 전 부문이 혈기왕성하던 60년대, 시티를 다룬 책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변화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자본은 개인이 아닌 사회 발전에 복무해야 한다'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고상한 꿈을 짓밟을 무언가가 크고 있었다.

1950년대 말 브레턴우즈 체제의 핵심 국가인 미국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났다. 달러를 공평무사한 국제통화로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공산주의 국가인 유고슬라비아의 금을 압수했다. 깜짝 놀란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달러를 미국 뉴욕이 아닌 유럽 은행에 맡겨두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1956년 미국으로부터 수에즈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다. 이를 괘씸히 여긴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자국 은행에 보관된 달러에 접근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분개했다. 이는 명백히 중립적인 중재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은 경제 위기가 이어지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영국은 1957년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국제무역에 파운드화를 빌려주지 못하도록 은행들을 통제했다. 날로 하락하는 파운드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시티의 은행들은 익숙했던 사업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때문에 달러로 눈을 돌렸다. 영국 은행들은 미국의 감시망을 피해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 막대한 달러를 보관하고 있던 소련으로부터 돈을 빌려 융통했다. 이는 수지맞는 사업이었다. 미국에선 은행의 달러 대출 금리에 상한선이 있었다. 하지만 런던은 아니었다.

금융가에선 이런 달러를 '유러달러'라 불렀다. 미국의 감시와 통제를 피해 주로 유럽에서 융통되는 달러였다. 유러달러 덕분에 시티의 은행들은 조금이나마 숨통을 텄다.

하지만 규모가 큰 채권 발행은 전부 뉴욕시장에서 이뤄졌다. 시티의 은행들은 이 점이 못마땅했다. 돈을 빌리고자 하는 측은 대부분 전후 유럽의 기업들이었지만 자금을 대주고 고리의 이자나 수수료를 얻는 측은 늘 미국의 은행들이었다.

지크문트 바르부르크라 불리는 은행가는 미국 은행의 독점을 두고볼 수 없었다. 바르부르크는 시티의 끼리끼리 문화에서 외톨이였다. 일단 그의 국적은 독일이었다. 또 하나 이유는 은행의 임무는 기업들에게 자금을 융통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2년 바르부르크는 세계은행에 근무하던 지인으로부터 '미국 밖에서 통용되는 유러달러의 양이 대략 30억달러'라는 말을 들었다. 쓰이기를 기다리지만 마땅한 주인을 찾지 못하는 돈이었다. 1920년대 독일에서 은행업에 발을 들인 바르부르크는 외국 통화 표시 채권 발행을 주선하곤 했다. 그는 달러 표시 채권을 발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당시 기업이 달러를 빌리고 싶으면 뉴욕에서 관련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바르부르크는 미국 밖에 있는 30억달러의 상당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스위스였다. 1920년대부터 스위스는 각국 자산가의 현금과 자산의 은닉을 도와주는 사업으로 주가를 높였다. 60년대 유럽에서 통용되던 모든 종류의 돈의 약 5%는 스위스의 철제금고 안에 있었다.

멀쩡한 돈이 금고 속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바르부르크를 애타게 했다. 만약 스위스에 숨겨진 돈을 상품으로 만들어 융통할 수 있다면 큰 사업이 될 터였다. 스위스에 돈을 감춘 사람들에게 '은닉 보관료를 내느니 내가 발행하는 채권에 투자해 돈을 버시라'고 설득하고, 유럽 기업들에겐 '미국에서 비싼 수수료와 이자로 돈을 빌리느니 나에게 빌려 비용을 아끼라'고 종용하면 될 터였다.

생각은 좋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브레턴우즈 체제상 자본 이동에 대한 각국의 통제가 심했다. 바르부르크가 스위스의 돈을 런던으로 가져와 고객들에게 전달하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대박을 칠 사업을 밀어붙였다.

바르부르크는 1962년 10월 사업을 개시했다. 이때는 쿠바 미사일 사태로 미-소 냉전이 절정에 달하던 때였다. 때문에 전후 수립된 글로벌 금융질서를 뒤흔들려는 바르부르크의 시도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 7월 1일 바르부르크 팀은 마침내 은닉된 유러달러를 융통시키는 '유러본드' 발행에 성공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2차 대전 영웅으로 언론인이 됐다가 다시 은행가로 변신한 이언 프레이저가 핵심 역할을 맡았다. 프레이저는 동료 피터 스피라와 함께 각국 경계를 넘나들지 못하도록 설계된 각국의 세금정책과 자본통제를 연구해 이를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만약 영국에서 유러본드를 발행한다면 4%의 세금을 물어야 했다. 따라서 프레이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히폴공항에서 채권을 발행했다. 영국에서 채권이 최종 상환된다면 그에 따른 수익에 또 다른 세금을 내야 한다. 따라서 프레이저는 룩셈부르크에서 상환이 마무리되도록 조치했다. 영국에서 발행되거나 상환되는 채권이 아니었지만 런던증권거래소를 설득해 유러본드를 상장시킬 수 있도록 했다. 유러본드가 환율통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 우려한 프랑스와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영국 등의 중앙은행들을 찾아가 설득했다. 바르부르크는 영국중앙은행에 찾아가 "규제를 없애고 세금을 낮추지 않으면 내 은행을 룩셈부르크로 옮기겠다"고 협박했다.

바르부르크 팀의 마지막 트릭은 자금 수요자를 바꿔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국영 지주회사인 '산업부흥공사'(IRI)가 실제 차주였지만 도로공사인 '아우토스트라다'가 빌리는 것으로 서류를 꾸몄다. IRI가 자금을 빌릴 경우 세금을 원천징수 당하기 때문이었다.

사법관할권을 속이는 효과로 프레이저는 상당한 이자를 지급하는 채권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어떤 종류의 세금도 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어디서나 현금화할 수 있는 채권이었다. 이른바 '무기명채권'이었다. 프레이저의 유러본드는 마법과 같았다. 부자들은 유러본드가 나오기 전 스위스에 숨긴 재산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제 유러본드를 사서 어디든 갖고 다닐 수 있었다.

유러본드의 주요 구매자는 동유럽과 중남미의 개인이었다. 프레이저는 자서전에서 "여차하면 신속히 재산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며 "박해를 피해다니는 유대인들이나 몰락한 중남미 독재자들은 스위스에 재산을 숨겨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이 유러본드를 주로 구매했다"고 썼다.

유러달러와 유러본드의 탄생

역사가들에 따르면 초기 유러본드의 1/5 정도는 중남미 독재자들이 구매했고 나머지 4/5는 유럽의 고소득 전문직들이 탈세를 위해 구입했다. 보통 이들은 재산 대부분을 스위스나 룩셈부르크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유러본드가 나오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유러본드는 부자들의 재산을 자유롭게 했을 뿐 아니라 역외 조세피난처처럼 부자들을 위한 나라를 만드는 첫 걸음이 됐다. 프레이저의 대성공을 보며 시티의 은행들은 부자 고객들이 비자 통제나 언론 보도,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있도록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것이 바로 쇠락해가던 시티를 부흥시킨 '추악한 비밀'이었다. 결국 이는 오늘날 날로 확대되는 부의 불평등을 몰고온 신호탄이었다.

첫 발행된 유러본드 판매액은 1500만달러였다. 역외 조세회피처로 흘러들지 못하도록 막은 법적 걸림돌을 피할 수 있게 되자 유러본드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63년 하반기 3500만달러, 이듬해인 64년 5억1000만달러로 급증했다. 67년엔 처음으로 10억달러를 넘었다. 현재 유러본드 시장은 전 세계 가장 큰 금융시장 중 하나다.

시간이 지나면서 브레턴우즈 체제는 붕괴했다. 점점 더 많은 달러가 규제와 세금이 없는 역외로 이동했다. 하지만 역외에 있어도 달러는 달러였다. 역내든 역외든 35달러는 1온스의 금 가치와 동일했다.

달러는 '부분지급준비제'(fractional reserve)에 따라 증가한다. 민간 은행이 예금을 기초로 신용을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은행에 1달러를 예치하면, 은행은 그를 기반으로 대출을 해준다. 그러면 1달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앞서의 예금자와 뒤에 대출을 받은 2명이 된다. 대출을 받은 사람이 1달러를 다른 은행에 예금하면 그 은행은 마찬가지로 신용을 추가 창출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달러는 증식한다. 역내 체제에서 이럴진대 역외에서의 증식과정은 파악조차 안된다. 반면 금의 증가 속도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다. 35달러를 가져오면 1온스의 금으로 바꿔주겠다고 한 미국으로서는 더 이상 약속을 지키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물론 미국은 금과 달러의 가치를 지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자국에서 달러의 흐름을 규제하면 할수록 런던 등 역외로 빠져나가는 달러는 늘어만 갔다. 결국 금과 달러의 불균형은 심화됐다. 시티는 미 월가에 비해 훨씬 느슨한 규제, 보다 완화적인 정책으로 달러를 맞았다. 은행들도 월가보다 시티를 선호했다. 1964년 미국 은행들의 시티 지점은 11곳에 불과했지만, 75년엔 58개로 늘었다.

연방금융시스템을 관할하는 미국 통화감독청(OCC)은 런던에 상설사무소를 열고 미국은행의 영국 지점들을 감시했다. 하지만 OCC는 영국에서 힘을 쓸 수 없었다. 영국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중앙은행 은행감시국장인 짐 키오는 "미국의 씨티은행이 런던에서 미국 법을 어기는지에 대해 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라고 말했다.

마침내 미국은 달러와 금의 가치를 연동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신호였다. 이제 '돈의 진짜 주인은 소유한 사람인가, 그것을 만들어낸 국가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

돈을 가졌다면 영국 런던과 스위스의 친절한 은행들 덕분에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정부는 이를 막을 수 없다. 영국처럼 역외 조세회피처를 용인하는 한, 다른 나라들이 아무리 투기자본을 규제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각국이 자본 규제를 멈춘다면 자본은 원하는 곳 어디나 흘러갈 수 있게 된다. 그 주인은 그 어떤 규제당국보다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다.

바르부르크가 시작한 '돈의 자유를 찾는 여정'은 유러본드에 그치지 않았다. 기본 패턴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불로프는 "누군가 큰 돈을 벌게 해주겠다 속삭인다면, 그의 기업 소재지를 확인해보라. 아마 리히텐슈타인이나 뉴질랜드 자치령인 쿡아일랜드, 영국령 저지섬 등일 것"이라고 말했다.

유러본드의 출현을 지켜본 각 나라들은 경쟁적으로 규제와 세금을 낮추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규제와 높은 세금으로 유명했던 미국도 자국 은행들이 앞다퉈 런던에 지점을 내자 결국 규제와 세금을 낮췄다. 결국 바르부르크가 만들어낸 역외 '해적섬'들과 유사한 세상이 각국 사법권 내에 만들어지게 됐다. 각국은 더 큰 혜택을 주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경쟁적으로 부자들을 우대했다.

불로프는 "내년 1월이면 또 다시 옥스팜 보고서가 나와 언론을 장식할 것이다. 보나마다 과거보다 더 적은 수의 부자들이 더 많은 몫의 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소식일 것"이라며 "경제주권, 나아가 민주주의를 되찾고 싶다면 지금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우리는 더 많은 몫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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