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분리 완화' 시행령에 위임, 꼼수입법 추진

2018-09-17 11:34:12 게재

여야 '재벌 사금고화' 논란에 법률에서 제외 … 시민사회단체 "정권 따라 자의적 변경" 반발

국회가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제한한 '은산분리 규제'를 완화하기 위해 법률이 아닌 시행령에 '완화 대상'을 정하는 꼼수 입법을 추진 중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17일 국회와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이같은 내용의 은산분리 완화 등을 포함한 안건을 논의하는 정책의원 총회를 연다.

정무위 여야 간사는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 제정안을 논의하면서 핵심 쟁점인 은산분리 완화대상을 법에 명시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경제력 집중억제, 정보통신업 자산 비중을 감안해 대통령령(시행령)에서 제한'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동안 여야는 산업자본이 최대 34%까지 인터넷전문은행의 지분 보유를 허용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지만 민주당은 ICT(정보통신기술) 자산규모가 50% 이상인 기업에만 허용하자는 입장인 반면 자유한국당은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라며 반대했다. 은산분리 완화대상을 놓고 'ICT기업에 한해 허용'이라는 문제와 '모든 기업에 대한 허용'이라는 두 가지 사안이 대립하게 됐다. 시민사회단체가 우려하는 재벌은행의 탄생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것이다.

여야간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8월 국회에서 양측은 합의점을 찾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9월 국회에서는 당초 논란이 된 부분을 법안에서 빼고 시행령에 위임하는 우회 방안을 선택했다. 여당의 의견을 반영, 시행령에 반영할 완화대상에 '경제력 집중억제, 정보통신업 자산 비중 감안'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하지만 법률이 아닌 시행령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국회가 책임을 회피한 채 충분한 논의 없이 사실상 정부에 입법권한을 넘긴 셈이다.

당장은 정부가 은산분리 완화대상을 ICT기업에만 한정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더라도 일정기간이 지나거나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얼마든지 은산분리 규제의 벽을 허물어버릴 수 있게 됐다.

시민사회단체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통령의 공약 파기, 재벌의 은행 소유 허용"이라며 이날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인터넷전문은행특례법 제정 반대'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추혜선 정의당을 의원을 비롯해 참여하는 시민사회단체는 경실련·금융정의연대·민변 민생경제위·빚쟁이유니온(준)·금융노조·주빌리은행·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등이다.

이들은 "8월 임시국회에서 사회적 반대에 부딪힌 바 있는 은산분리 규제 완화 논의가 9월 정기국회에서도 최소한의 명분과 방향성도 잃은 채 맹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재벌대기업을 제외한다는 정부·여당의 은산분리 완화 명분과는 달리, 은산분리 완화 대상을 법률이 아닌 시행령에 위임, 향후 정권에 따라 자의적으로 변경하는 등 은산분리 원칙을 전면적으로 훼손할 가능성이 있는 졸속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고 반발했다.

이번 합의안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은 "ICT 기업 특혜와 재벌 진입 규제를 맞바꾼 '주고 받기식' 밀실 야합"이라며 "최초 정부·여당안 보다 오히려 후퇴했고 자유한국당이 주장하는 안에 단서 조항을 넣은 법안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는 "재벌에 은행업 진출이라는 문을 활짝 열어주게 된다"며 "경제력이 집중된 재벌이 은행업까지 진출하면 해외송금 등을 통한 비자금 조성을 막을 수 없는, 사실상 재벌 왕국이 되는 것"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한편 은산분리 규제완화를 놓고 15일 한국증권법학회 정기세미나에서도 공방이 벌어졌다. 이날 김도형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금융혁신과 금산분리'를 주제로 발표를 했다. 김 변호사는 "현재의 금산분리 제도가 급격히 변화하는 핀테크 산업이나 혁신 산업의 성장에 역행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며 "금산분리 제도 완화를 통해 금융과 산업이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토론자로 나온 고동원 성균관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금산분리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을 때의 문제점이 도대체 무엇이냐"며 "인터넷전문은행을 시중은행으로 봐야할지 지방은행으로 봐야할지에 대한 법률적인 정의부터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시중은행은 최저자본금이 1000억원 이상이고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보유가 10%(의결권 4%)까지 허용되지만 지방은행은 자본금 250억원 이상이고 지분보유가 15%(의결권 동일) 까지 허용된다. 여야가 합의한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안에는 최저자본금을 250억원으로 낮추는 안이 포함돼 있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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