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해운입찰 앞두고 선주와 화주 상생 협약

2018-11-02 09:06:14 게재
김영무 한국선주협회 상근부회장

대형 화주들은 내년 한 해 동안 예상되는 수출화물에 대한 운송서비스를 일괄해서 구매하는 입찰을 진행한다. 10월부터 12월 사이가 입찰시즌이다.

부산에서 로텔담으로 가야할 컨테이너 화물이 매달 500개로 예상된다고 입찰을 붙이면 운송업자인 해운회사들은 자기가 얼마에 실어주겠다고 응찰하고 화주는 응찰한 해운선사들 중 자신의 화물을 실어줄 회사를 골라 낙찰한다.

여러 선사 중 컨테이너 한 개당 700달러로 응찰한 선사가 최종 낙찰됐다고 하자. 입찰을 붙인 화주기업과 낙찰 받은 해운기업은 일종의 약속을 한 셈이 된다. 매달 500개의 컨테이너를 개당 700달러씩 받고 운송하기로 새끼손가락을 건 것이다.

반복되는 악순환 선주나 화주 모두에게 상처 남겨

약속은 깨지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생산 공장에 불이 나서 약속한 500개 분량의 수출품이 생산되지 않을 수도 있다. 파업으로 생산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고, 길이 막혀 출항시간까지 컨테이너를 싣지 못 할 수도 있다. 상품을 팔아야하는 미국에서 수요가 부진해, 또는 관세장벽이 높아져서 수출길이 막히기도 한다.

선박회사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생길 수 있다. 태풍을 만나 선박이 제시간에 못 올 수도 있고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어떤 항만이 혼잡해 지체되기도 하고, 각종 검사에 불합격해 가동을 못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예상 밖의 사고로 생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 자기가 유리한 약속만 지키고 불리한 건 안 지키려고 하는데서 터진다. 제3의 선사가 나타나서 600달러에 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화주는 이미 낙찰 받은 선사에게 700달러를 600달러로 깎아 달라고 요청한다. 선사가 요구에 응하지 못하면 화물 500개 중 200개를 새로 나타난 선사에게 줘 버린다. 500개로 생각하고 700달러에 실어주겠다고 했던 낙찰 선사는 비상이 걸린다. 300개로 줄었으니 운임을 올려 달라고 해야겠지만 말도 못 꺼낸다. 화주는 500개는 예상량이었을 뿐이라며 나 몰라라 한다.

어떤 경우는 출항시간에 임박해서 예약한 화물을 취소하기도 한다. 선사는 화물이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빈 배로 출항할 판이다.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선사는 취소되는 물량을 감안해서 배에 실을 수 없는 정도로 많은 화물을 예약 받는다. 예상보다 취소하는 화물이 적은 경우는 짐 실을 자리가 없어서 화물을 못 싣기도 한다. 짐을 못 실은 화주는 물류차질에 가슴을 치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반복되는 악순환은 선주나 화주 모두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약속을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무는 생각하지 않고 권리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수라장이다.

지난달 23일 화주업계의 '빅 3'이자 재벌기업 물류자회사인 현대글로비스, 판토스, 삼성SDS와 정기선사연합체인 한국해운연합이 한자리에 모여 선·화주 상생협력을 다짐했다.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도 '중매쟁이' 역할을 자임하며 선·화주 상생협력에 의미를 부여하고 선·화주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져나갈 정책지원도 약속했다. 마침 입찰시즌이 시작하는 때 개최된 협약식이어서 더욱 의미가 컸다.

선화주가 서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점은 서로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더라도 미리미리 알려주는 자세야 말로 약속을 지키려는 자세다.

이런 자세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관습이자 문화처럼 점차 형성된다. 최소물량 약정이나 위약금 부과 같은 제도적인 장치도 이런 문화를 굳건히 해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약속지키려 노력해야 아수라장 극복

특히 이번 입찰시즌에 걱정이 많은 이유는 예측불허 연료비 때문이다. 이란과 사우디 사태 등 외교적 변수가 유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할 수 없고, 환경규제에 따라 반드시 필요하게 된 저유황유 가격대도 어떻게 형성될지 오리무중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가에 연동하는 유류할증제 도입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정부도 부당하게 계약을 위반해 상호 신뢰에 금을 내는 일을 제재하는 등 공정거래 정착을 위한 해운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어 고무적이다. 선주와 화주가 이인삼각으로 서로를 도와야 할 때다.

김영무 한국선주협회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