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마을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다

2018-11-15 15:45:07 게재

파주시중앙도서관 <시민채록단>

역사란 무엇일까. 위대한 업적을 세운 위인들이나 후대에 부끄러운 악행을 저지른 악인들의 스펙터클한 이야기들이 떠오르지만, 실상 역사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삶의 이야기 자체일지도 모른다. 빛나지도 요란하지도 않지만 격동의 시대에는 고난을 고스란히 겪어내고, 안정의 시대에는 제 몫의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쌓이고 쌓여 오늘의 역사라는 강물이 흐르는 건지도. 신도시 개발로 점차 과거의 모습을 잃어가는 파주시에서 잊혀져가는 삶의 역사를 찾아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파주시중앙도서관(관장 윤명희) ‘시민채록단’을 만나 삶이 곧 역사가 되는 이야기를 들어본다.



‘사람이 곧 역사’ 기억하고 기록하는 시민들
파주시중앙도서관 ‘시민채록단’은 쉽게 잊히기 쉬운 개인적 영역의 삶의 이야기들을 기록하자는 취지에서 조직된 시민동아리다. 신도시 개발로 파주의 논밭과 옛 마을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즈음, 파주시중앙도서관에서는 사라지는 옛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2017년에 인문학 강좌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하여’를 진행했다. 뒤이어 2018년에는 ‘삶이 책이 되다’라는 후속 강좌를 운영하며, 사라져가는 삶의 이야기를 책으로 펼쳐내는 시민채록단 동아리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휴먼in파주 전시회, 시민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시민채록단의 첫 번째 활동은 파주에서 40년 이상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마을의 역사와 생활모습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파주시중앙도서관 양태성 주무관은 “마을이야기라고 하면 너무 광범위해서 파주에서 오래 사신 인물을 찾아 그분들의 삶을 채록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시민채록단 1기 회원들은 파주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아온 김호기씨와 파주문인협회를 창단한 이영복씨를 만나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채록했고 ‘휴먼in파주’ 전시회를 통해 그 결과물들을 공유했다. 박근우 회원은 “90세를 훨씬 넘기신 김호기 선생님께서 전시회가 열리는 두 달 동안 매일 중앙도서관을 찾으시면서 당신의 삶이 역사가 되고 후세대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큰 보람을 느끼셨다”라고 말했다. 휴먼in파주 전시회에 이어 ‘시민과의 만남’을 열었던 이영복씨는 두 시간 동안 파주시민들과 만나 파주에서의 삶을 반추하며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라져가는 봉일천 4리 마을이야기 담아
시민채록단의 두 번째 활동은 개인의 삶에서 마을의 이야기로 확장되고 있다. 시민채록단 2기 회원들은 미군부대 이전으로 도시 개발 논의가 진행되고 있던 봉일천 4리를 찾아가 6.25 전쟁, 미군부대 주둔과 이전으로 인한 봉일천 4리의 변천사를 담아내고 있다. 회원 정의숙씨는 “미군이 떠난 봉일천 4리는 그 자체로 정지된 화면과 같은 마을입니다. 그곳에서 몇 십 년씩 살아오신 주민 분을 어렵사리 만나 이야기를 듣고 채록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분명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윤지미 회원은 “미군부대로 인해 물자와 돈이 풍성했던 마을이면서 동시에 기지촌의 오명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보통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 8월부터 시작된 봉일천 4리 마을이야기는 곧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도서관 하나에 비견되는 마을 어르신의 삶 담아내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한 마을에서 40~50년 이상 살아온 사람이라면 여느 역사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삶의 역사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회원 윤지미씨는 “역사의 산 증인인 그분들의 입을 통해 작은 역사들을 모아 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민채록단의 활동은 공적 영역의 역사가 채우지 못하는 개개인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와 역사 연표들이 메우지 못하는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 기록하는 의미 있는 활동이 되고 있다. 

미니인터뷰


박근우씨

인생의 마지막 여로에 계신 선배 교육자 김호기 선생님을 만나면서 선생님께서 이 일을 명예롭게 받아들이시고 마음 속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김호기 선생님의 인생 전시회에서는 파주에 있는 많은 제자들이 꽃 선물을 보내며 축하해주었고 김호기 선생님 또한 지난 교직생활에 큰 보람을 느끼셨습니다. 개인의 역사를 남기는 것이 후대에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당사자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허경숙씨

저는 서울토박이로 시골 정서를 전혀 모르고 자랐어요. 파주로 이사 온 뒤에도 서울에서처럼 생활하던 중 시민채록단을 통해 시골 정서가 무엇인지 깨달았어요. 처음에 채록단 일을 하면서 효율적이고 사무적인 방식으로 일했는데, 점차 사람들을 대하는 제 태도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갖게 됐어요. 사람들에게 좀더 인간적이고 정겹게 다가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시민채록단 사업은 참 가치있는 일이라서 앞으로도 시민채록단 사업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어요.


윤지미씨

시민채록단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누군가 자기 삶에 질문을 던져준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기뻐하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의 질문을 통해 지나온 삶을 떠올리고 함께 했던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결국 그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 같아요. 또 그분들은 당신의 삶이 글이 되어 후대에 남겨진다는 것이 신기하고 또 감사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정병규 작가

저는 시민채록단 회원들이 채록해온 원고를 책으로 엮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채록 원고에는 소멸될지도 모르는 마을의 이야기들,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들, 이 지역에서만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요. 농경사회로 자연이 그대로 보존돼 있던 파주가 전쟁을 겪으며 피난민들이 내려오고, 전후 미군부대로 인해 지역경제가 변하고 또 미군의 철수로 인해 개발의 논리에 처한 마을의 변천사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어떤 문학작품보다 재미있고 흥미롭고 매력 있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양태성 주무관

도서관 인문학강좌를 들으신 후 후속 동아리 활동까지 열성적으로 해주시는 회원분들이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시민채록단 회원들은 개인의 삶과 마을이야기를 채록하기 위해 파주의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교통비나 어르신 간식비를 자비로 충당하면서 파주의 옛 이야기를 모으고 계시니 그 열의가 정말 대단하십니다.

태정은 리포터 hoanhoa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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