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

"지방 중심이라 광주학생독립운동 저평가"

2019-01-02 11:33:03 게재

독립운동 침체기에 일어난 유일한 항일운동

미래세대에 학생독립운동 가치 깨닫게 해야

해방이후 행적으로 서훈대상 제외는 잘못돼

이계형(51·사진) 국민대 특임교수는 독립운동 3세대 연구자다. 한국근대사를 전공했다. 이 특임교수가 바라보는 3세대 연구자는 1~2세대와 다르다. 그는 "연구방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1세대와 2세대는 '언제 누가 뭘 했는지' 같은 사실관계를 규명하는데 매달렸다. 그가 말하는 3세대 연구자는 역사적 가치라는 큰 틀에서 개별사건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지난해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서 그에게 독립유공자 현황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짚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미서훈자'에 집중했다. 그는 '광주학생운동 참여자 독립유공자 현황과 공훈사업 개선방향'이라는 긴 제목의 논문에서 주요시위 주동자를 분석해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투사들을 조명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된 독립유공자가 212명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때문에 학생독립운동이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 항일시위인데도 사실상 사각지대에 있었다는 점이 부각됐다. 그는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하고, 만주독립군도 와해되는 등 국내외 독립운동이 침체기에 들어간 시기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역사적 위상과 가치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특임교수는 "그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3대 항일운동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저평가 된 것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시작됐다는 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전국적 항일운동인데 독립유공자 숫자가 너무 적다.

일제가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재판했을 때 이들을 처벌할 법 조항이 명확치 않았다. 3.1운동 당시 출판법 소요법 제7법 조항이 만들어졌는데 그걸 적용하기 어려웠다. 1925년 만들어진 치안유지법과 출판법으로 처벌하는 것도 맞지 않았다. 당시 참여 학생들 대부분이 격문을 만들었기 때문에 출판법에도 걸릴 수 있었지만 그들은 등사를 않는 방식으로 이를 피했다. 그래서 핵심시위주동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학생들을 처벌할 법적규정이 애매한 상황에서 최고의 처벌은 퇴학이었다.

지난해까지 독립유공자 심사기준이 '옥고 3개월 이상'였기 때문에 독립운동공적이 인정되어도 '퇴학'을 당한 사람들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서울지역 시위주동자 111명 중 13명만 서훈을 받았는데 같은 이유에서다.

■ 최근 정부가 포상심사기준에 '퇴학'을 포함시키고 '학적부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대상 범위를 확대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봐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1929년은 국내외 독립운동이 침체기에 들어간 시기다. 임시정부도 1925년 이후에는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가 됐다. 만주 독립군도 일본의 압박에 거의 와해됐다. 우익계통 민족주의자 중 일부가 일제에 협조하기 시작한 시기다. 어느 누구도 독립을 외치지 못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벌였다는 건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그런데 학생독립운동이라 일반인 독립운동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는 명칭도 낮은 평가를 받은 이유다. 모든 운동이 서울 중심이라 그렇다. 이 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났다면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명칭을 바꾸자는 사람들이 있는데 반대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웠는데 11.3학생운동으로 정립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것보다 역사적 위상과 가치를 정립하는 게 중요하다.

■ 보훈처가 참여 학교 학적부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있지만 학적부가 없는 학교들이 111개나 된다.

공훈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학적부 일제공문서 같은 원전자료가 있어야 한다. 일제 보고서에 의하면 남북 통틀어 이 운동으로 580여명이 퇴학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장 일차적인 자료가 없어졌다. 퇴학자 명단은 신문기사나 일제 보고서에 다 나오지 않는다. 당시 교육청과 유사한 상급부서까지 퇴학자 명단이 보고됐는지 자료를 모두 찾아봐야 한다. 독립유공자 증빙자료가 되긴 힘들겠지만 당사자는 대부분 사망한 상황이라 후손들의 구술이라도 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필이력서 같은 것이 발견될 수도 있다.

■ 현재의 포상심사기준에서 더욱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념'이다. 정부가 독립유공자 포상 범위를 확대시켰지만 지금도 월북하거나 북한정권 수립에 협조한 사람은 제외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 경계선에 있는 애매모호한 사람이 있다. 장재성씨는 광주학생운동 전체 기획을 했던 사람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4년 옥살이를 했다. 나중에 사회주의 활동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문제는 해방 이후 그의 행적이다. 전남지역에서 좌익 활동을 하면서 북한에도 2~3회 다녀왔다. 그런 문제로 1950년 6.25전쟁 발발당시 경찰에 총살당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독립운동의 범위는 1945년 8월 14일까지다. 그 때까지만 따져야 한다. 해방이후의 잘잘못을 이유로 처음부터 서훈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그 취지에 어긋난다고 본다.

■ 올해 정부 주관 기념식이 부활했다.

정부주관 기념식이라지만 기존의 기념식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강제 동원되고 행사를 기획하는 사람도 똑같다면 새로운 게 나올 수 없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리 것이다'는 생각부터 없애야 한다. 광주가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전국화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요즘 학생들이 학생독립운동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 왜 기념식에 참석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국사교과서에 나와 다들 알고는 있다. 그런데 그게 우리 선배들의 얘기라는 것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

앞으로 기념식이나 행사는 학생들이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7~10세였다. 그런데 그들은 10년 뒤에 3.1운동과 똑같은 방식으로 시위를 벌였다. 잘 몰랐지만 체득한 것이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제 교육을 받은 세대다. 일본인을 만드는 보통학교 교육을 거쳐 고등교육까지 받았는데 식민지교육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스스로 깨달았다.

당시 학생들이 사회 지도층 역할을 했다고 본다. 정부가 예산은 지원하되 학생들이 직접 기획해 자연스럽게 정신을 깨닫는 기념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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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택 기자 durumi@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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