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대출채권담보부증권)시장 지배하는 일본 농협은행

2019-02-20 11:00:33 게재
회사채를 발행하려던 미국 기업들은 지난달 상당히 고전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12월 금융시장의 급락세가 멈춘 뒤 시장 상황이 좋아지고 있었지만, 일본 '큰손 은행'의 숨고르기 때문에 정크등급 회사채 시장이 크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일본 '노린추킨은행'(농림중앙금고은행) 이야기다.

월스트리트저널(WSJ) 19일자 보도에 따르면 95년 역사의 노린추킨은행은 농협과 임협, 수협으로 구성된 협동조합은행으로, 6000억달러가 넘는 예금을 보유하고 있다. 전 세계 7000억달러로 추산되는 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 시장의 최대 큰손이다.


CLO는 신용도가 낮은(정크등급) 기업들에 대한 은행의 대출채권을 묶어 이를 담보로 발행하는 채권의 일종이다. 미국 정크등급 기업들이 발행하는 채권의 절반 이상이 CLO로 구조화돼 거래된다.

노린추킨은행의 CLO 보유량은 JP모간체이스와 웰스파고은행의 보유량을 합한 것과 맞먹는다. 때문에 CLO시장에 대한 영향력이 계속 커지고 있다. 2018년 4/4분기에만 98억7000만달러 어치의 CLO를 사들였다. 같은 기간 미국과 유럽에서 발행된 CLO의 1/3에 육박한다.

지난 몇년 동안 CLO시장은 호황이었다. 미국 기준금리가 오르면서 변동금리를 내세운 CLO가 은행과 장기 투자자에게 인기를 얻게 된 것.

WSJ는 "노린추킨은행이 CLO시장에서 두각을 보이는 건 2가지 의미를 지닌다"며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확산되는 때 CLO의 매력이 높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 어떤 금융상품이라도 집중투자에 따른 리스크는 불가피하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지난달 노린추킨은행이 거대 규모의 CLO 거래를 고민하면서 잠시 매수활동을 숨고르기 하자 CLO시장이 얼어붙었다. 노린추킨은행이 다시 매수활동에 나서면서 복귀하자 CLO시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노린추킨은행의 부재를 시장에서 아프게 느낄 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걸 보여준다.

CLO시장은 2014년 이후 대략 2배 성장했다. 전체 회사채 규모가 사상 최고수준으로 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은행 등 대출기관들은 고객에게 CLO를 팔아 확보한 유동성으로 레버리지론을 확대해 나간다. 기업들은 레버리지론을 통해 차환이나 인수합병에 나선다.

WSJ는 "이 과정은 노린추킨은행이 일본의 농부와 어부에게 중요한 것만큼 미국의 중소기업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며 "노린추킨은행의 예금은 CLO를 통해 미국 기업의 금융상황을 좌우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같은 글로벌 금융의 상호연관성은 이전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10년 전 미국 주택시장이 붕괴했을 때 서브프라임모기지에 대거 투자했던 독일 국영 산업은행(IKB Deutsche Industriebank)이 파산했다. 또 2008년 아이슬란드의 금융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도쿄와 캘리포니아 등 전 세계 투자자들이 파산했다.

물론 노린추킨은행은 신용시장에서 신참내기가 아니다. CLO 투자는 2000년대 초까지 거슬러오른다. 1990년대 일본의 금리가 급격히 하락하면서다.

일본의 농부와 어부들이 자신의 땅을 산업 및 상업용지로 매각하면서 막대한 돈을 쥐게 됐고, 이에 따라 노린추킨은행의 덩치도 덩달아 커졌다. 노린추킨은행은 수십억달러를 투자할 수 있는 외국의 금융시장을 열심히 찾았다. CLO를 포함해 구조화된 신용상품에 대한 전문성을 키우기 시작했다.

1조달러 넘는 자산을 가진 노린추킨은행은 뉴욕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사무실을 갖고 있다. 투자를 근거리에서 진행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미국 비즈니스스쿨에 다니는 노린추킨은행 직원들은 미국의 CLO 매니저들과 정기적으로 교류한다. 또 인턴 형태로 직업훈련을 받으며 어떤 CLO를 사고 팔아야 하는지 공부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미국과 유럽의 많은 은행들은 CLO 보유 규모를 크게 줄였다. 하지만 노린추킨은행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투자를 이어갔다.

노린추킨은행은 까다로운 투자자다. 거래를 유지하는 CLO 매니저가 15~25명 선이다. CLO 매니저들은 1년에 수차례 노린추킨은행 일본 본점을 방문해야 한다. 일본 방문 대상자가 된다는 건 CLO 매니저들에게 중요한 일이다.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노린추킨은행 중역들은 종종 CLO 매니저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투자대상 기업들에 대해 자세히 묻는다. 적절하고 신속한 답변을 못한 매니저들은 노린추킨은행과 더 이상 거래할 수 없다.

한 CLO 매니저는 "노린추킨은행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은 매니저로서는 매우 값진 일"이라며 "시장이 요동칠 때도 노린추킨은행은 투자를 거둬들이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미국의 거대 은행 상당수가 CLO시장에서 손을 뗐다. 기준금리가 오르면서 다른 유망한 투자처가 속속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린추킨은행은 오히려 CLO 매수량을 늘렸다. 아무리 수익률이 적어도 일본 국내의 제로금리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S&P글로벌에 따르면 노린추킨은행은 지난해 1분기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발행한 CLO의 23%를 가져갔다. CLO 중에서도 최고등급만 사들인다. 거래 규모도 크다. 단일 CLO 거래에 1억달러 이상을 투자하기도 한다.

다음달이면 일본 유가증권법이 개정될 전망이다. 은행들이 지급준비금을 더 충당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되면 노린추킨은행의 CLO 투자규모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WSJ는 "미국의 로펌회사들과 금융기관들이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본 금융서비스국에 각종 청원을 넣고 있는 상황"이라며 "CLO시장에서 노린추킨은행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