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재정, 이제 '구시대 유물' 됐나

2019-04-29 11:37:25 게재

FT "미국과 일본 유럽의 정치권-학계에서 '경제 위해 적자·부채 괜찮다' 인식 확산"

전 세계 주요국가에서 '균형재정' '재정건전성' 등 벌이와 씀씀이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경제학의 주요 개념이 과거의 유물처럼 치부되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28일자로 전했다.

FT에 따르면 미국 민주당 유타주의 초선 하원의원인 벤 맥애덤스는 이달 초 '전쟁과 경제침체가 아닌 평상시 미 행정부가 재정균형을 달성하지 못하면 이를 위헌으로 본다'는 내용의 법률 수정안을 발의했다. 민주당, 공화당 가릴 것 없이 워싱턴 정치권이 재정적자를 줄여보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반영된 법률 제안이었다.

하지만 맥애덤스의 법안은 같은 당에서 강력한 반발을 불렀다. 솔트레이크카운티 지자체장을 지낸 "정치인이란 물과 같다. 저항이 덜한 방향으로 흘러가려 한다"며 "우리 시대 저항이 덜한 쪽은 적자지출"이라고 말했다. FT는 "균형재정을 옹호하는 보수론자들은 한때 공화당과 민주당 내에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멸종위기에 처한 듯 보인다"고 지적했다.

2020~2029년 미국의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 평균 4.4%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는 지난 50년 연 평균 2.9%에 비해 상당히 높다(왼쪽 그래프). 한편 2048년 미국의 정부부채는 GDP 대비 150%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미 의회 예산처는 2020~2029년 미국의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 평균 4.4%에 달할 것으로 최근 전망했다. 지난 50년 연 평균 2.9%에 비해 상당히 높다.

맥애덤스의 수정안은 경제와 사회정책에서 중도보수를 표방하는 민주당 의원 모임인 '블루도그 연합'(Blue Dog coalition)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통과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FT는 "맥애덤스의 법안은 균형재정과 관련한 통념이 이제는 과거의 유물로 변했다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평했다.

재정을 대폭 완호하는 흐름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낮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각국 중앙은행들은 기준금리를 오랜 기간 낮춘 상태다. 그 결과 공적부채의 이자비용이 낮아졌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런 점을 거론하며 '균형재정이라는 족쇄를 풀어버린다 해도 고통은 적고 이득은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 40년 동안 경제의 흐름을 지배하는 행위자는 중앙은행들이었다. 앞선 30년 간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통화정책을 단행했던, 그 다음 10년 간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뒤이은 경제침체를 막기 위해 초저금리와 양적완화을 집행하는 행위자였다. 하지만 경제성장을 추동할 수 있는 잠재력은 중앙은행에서 중앙정부의 지출과 재정정책으로 넘어갔다는 지적이다.

미국정부가 부채에 대해 지불하는 순이자지출이 2092년 정부 총지출의 90%에 육박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FT는 "워싱턴 정치인들은 재정적자에 대해 공개적으로 개탄하지만, 실상 많은 이들이 적자를 용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화당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정적자 확대 경로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곧 연간 1조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민주당에서는 뉴욕주 하원의원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의원이나 버니 샌더스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오카시오-코르테즈 의원은 "정부의 모든 지출을 세금으로 상쇄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민주당 내 진보파들은 '공공의료보험 지출과 환경 친화적인 투자에 재정을 크게 늘려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2016년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버니 샌더스 의원은 '인플레이션이 낮다면 재정적자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 스테파니 켈튼 교수의 조언을 받고 있다.

중간지대에 있는 경제학자들도 재정적자를 용인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경제자문을 맡았던 로렌스 서머스 교수와 제이슨 퍼먼 교수는 올해 초 "미국 정계가 부채에 대한 과민반응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달러로 빌리고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미국에서 재정위기는 거의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분석기관 무디스 애널리틱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마크 잰디는 "재정 둑이 무너지고 있다"며 "공화당이나 민주당 모두 재정적자와 부채를 무시하게 만드는 이론을 갖고 있다. 재정과 관련한 게임의 법칙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일본은 지난 20여년 동안 정부예산 제약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는 대표적 나라였다. 유럽에서도 '공공재정은 지속가능해야 하고 건전해야 한다'는 오래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정치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독일은 '슈바르츠 눌'이라 불리는 균형재정 정책을 완화하고 대신 사회기반시설에 투자를 강화하라는 압력이 커지고 있다. 재정적자에 대한 통념이 바뀌는 상황은 정치인들에게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세금감면이나 공공지출 확대 등 유권자에게 인기 높은 정책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정치인들은 재정 신뢰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우려했다. 이자비용과 인플레이션의 폭등의 리스크 또는 공공부채 증가와 관련된 저성장 우려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리안츠 수석 경제자문인 모하메드 엘-에리안은 "하지만 이제 여러가지 상황 변화가 재정정책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다"며 "중앙은행들이 초저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했지만 인플레이션 압력은 없고, 포용성장 대신 부자들만 살찌웠다는 부작용만 생겼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게다가 중앙은행이 포용성장을 자극하고 금융안정성을 일구는 유일한 행위자는 아니라는 인식이 늘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변화하는 정치적 환경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후보 시절 '정부부채를 단 8년 내 모두 갚아버릴 것'이라고 공언했다.

당선 직후 균형재정 강경 옹호론자인 믹 멀베이니를 백악관 예산관리국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직후 태도를 바꿨다. 사회보장지출과 연기금 의료지출 등 공공지출이 늘어나는 근본적 원인을 개혁하는 작업을 외면했다. 동시에 대규모 세금 감면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세금을 감면하면 경제성장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FT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으로 미국은 막대한 재정 적자를 오랜 기간 유지하게 될 전망"이라며 "전쟁과 경제침체가 아닌 평상시에, 그것도 완전고용 수준으로 경제가 확장한 때에는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 경제자문인 케빈 해싯은 FT와의 인터뷰에서 "백악관은 재정적자에 신경을 쓰고 있다"며 "세금감면은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때문에 옳은 정책이다. 그리고 효과를 내고 있다"고 밝혔다.

"전례없는 재정실험, 연착륙할까 경착륙할까" 으로 이어짐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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