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영문학 전공 감소 우려 왜?

2019-10-21 11:45:35 게재

워싱턴포스트 "숫자보다 중요한 건 스토리"

미국 대학 내 전공 변화에 많은 경제학자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20일자로 전했다. WP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가 촉발된 2008년 가을부터 미국 고교생들이 영어영문학 등 인문학 전공을 회피하고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전공, 특히 컴퓨터학과 공학에 몰리고 있다.

미국 국립교육통계센터에 따르면 영어영문학 전공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5.5% 줄었다. 센터가 연간통계를 내는 전공 가운데 하락폭이 가장 크다. WP는 "지난 10년 간 대학 입학생이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다소 충격적인 결과"라고 전했다.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은 이같은 전공 변화의 이유로 '일자리'를 꼽는다. 인문학 전공의 경우 직업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것. 학생과 부모들은 졸업 후 안정적인 연봉을 받는 일자리를 선호한다. STEM 전공은 직장을 얻는 지름길이다. 컴퓨터학과 헬스케어 전공자는 2009~2017년 동안 2배 가까이 늘었다. 공학과 수학 전공자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반면 인문학 전공자는 수십년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다소 이례적인 곳에서 나오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인문학 전공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고 나선 것.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예일대 로버트 실러 교수는 최신간 '내러티브 이코노믹스'(Narrative Economics)에서 자신이 미시건대 재학 시절 역사학 수업을 통해 계몽됐음을 회상하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실러 교수는 "1930년대 '대공황' 기간 동안 경제·금융적 파탄의 이유와 경과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경제학보다 역사학 덕분"이라고 썼다.

내러티브 이코노믹스를 관통하는 전제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 것. 즉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경제학을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시장, 나아가 경제 전반에 심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최대한 빨리 부자가 되고 싶다'는 스토리는 비트코인 광풍을 몰고왔고, '누구나 집을 소유할 수 있다'는 스토리는 부동산거품을 일으켰다.

쉴러 교수는 "전통적인 경제학적 접근법은 주요 경제적 사건들에 대해 대중에게 스토리를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며 "경제학자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지를 연구해야 최선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00년대 초의 닷컴버블을 예고한 데 이어 '케이스-실러 주택가격지수'를 개발해 유명세를 탄 실러 교수는 현재 많은 시간을 들여 옛날 신문 스크랩을 훑는다. 특정 경제스토리와 용어가 어떻게 대중의 입소문을 탔는지, 그같은 스토리와 용어가 대중의 구매 행위를 어떻게 자극하고 단념시키는지에 연구하기 위해서다. 그는 "더 많은 영어영문, 역사 등 인문학 전공자가 필요하다"며 "지적인 삶의 분절화는 나쁘다"고 말했다.

더 많은 스토리텔러, 더 많은 스토리 분석가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실러 교수뿐 아니다. 매년 8월 전 세계 최고 경제학자들이 와이오밍주 잭슨홀에 모여 경제정책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세계 경제가 어떤 상황인지, 경제모델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논의한다. 올해 잭슨홀 회의 마지막 날 호주중앙은행 필립 로위 총재는 동료 경제학자들에게 숫자에 관심을 덜 기울이고, 대신 좋은 스토리텔러가 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숫자나 계수, 경제법칙 등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개발하는 게 중요하다"며 "경제정책이 복지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사람들에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잭슨홀 회의에 참석한 한 경제학자는 자마이카중앙은행이 레게음악 연주자를 고용해 '인플레이션이 높아지면 얼마나 나쁜 상황이 벌어지는지'를 쉽게 설명하도록 했다는 점을 소개했다.

스웨덴중앙은행 총재인 스테판 잉베스는 "나는 스토리텔러"라며 "미래에 대한 스토리를 전달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인 우리는 미래에 대한 스토리를 좋아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게 내 임무"라고 강조했다.

잉베스 총재는 "각국 중앙은행은 기업과 대중에게 경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거대한 플랫폼을 갖고 있다"며 "경제성장이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스토리를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면, 기업은 더 많이 고용하고 소비자는 더 많이 지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사례 중 하나는 미국 대통령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현재가 가장 강력한 경제성장의 단계에 있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실러 교수는 "그의 주장이 사실에 기반하지는 않지만 미국민에게 자신감을 갖고 계속 소비하라고 고무하는 긍정적 스토리의 일환"이라고 평가했다.

학생과 부모들에게 인문학 전공을 포기하지 말라고 촉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장은 바로 데이터다. 국립교육통계센터가 2017년 전공에 따른 연봉과 실업률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25~29세 컴퓨터학 전공 졸업자 중 중앙값에 위치한 사람은 연봉 6만5400달러를 받았다.

반면 영어영문학 전공 졸업자는 4만400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25~29세 영어영문학 전공 졸업자의 실업률은 3.4%인데 반해 수학이나 컴퓨터학 전공자의 실업률은 각각 3.9%, 3.7%였다.

하버드대 데이비드 J. 데밍 교수, 카딤 L. 노레이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STEM 전공 졸업자의 초기 연봉 프리미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고 한다. STEM 전공자들이 졸업한 지 10년이 넘으면 이들이 숙지한 기술이 더 이상 최신이거나 최고 기술이 아니게 된다. 이 때문에 직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한다는 것. 반면 많은 인문학 전공자들은 졸업 10년이 지나면 고연봉 경영진 자리에 합류하기 시작한다. 40대 중년이 되면 평균 연봉은 전공 가릴 것 없이 비슷해지는 경향이 있다.

데밍 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40세가 되면 사회과학이나 역사학 전공자들이 받는 연봉이 STEM 전공자들과 비슷해진다"고 썼다.

WP는 "기업 경영진의 덕목 중 하나는 의사소통 기술과 경험"이라며 "세계 경제가 결정적인 갈림길에 선 지금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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