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화, 글로벌 통화 향해 우보천리

2020-05-13 11:47:07 게재

영국 이코노미스트 스페셜리포트 III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최신호에 따르면 프랑스의 BNP파리바 은행은 2004~2012년 수단과 쿠바, 이란에 300억달러 자금이 유입되는 것을 도왔다. 3국 모두 미국의 제재를 받는 와중이었다. BNP파리바는 위성은행 네트워크를 활용했고 지급 정보에서 유죄의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삭제해 미국의 자금 추적을 피했다. 내부고발자들이 미국 사법당국에 관련 내용을 넘겼다. BNP파리바는 유죄협상을 벌였고 11억유로(12억달러) 상당의 벌금을 물 것으로 자체 예상했다. 하지만 2014년 미국 사법당국은 89억달러의 벌금을 매겼다. 이 사건은 미국과 프랑스의 외교분쟁으로 비화했다.

BNP파리바는 미국의 위력에 즉각 무릎을 꿇었다. 달러거래의 보안을 감독하는 기구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겼다. 타국의 글로벌 은행이 미국으로 주요 부서를 옮긴 첫 사례였다. 십수명의 직원이 일자리를 잃었고 준법감시팀은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BNP파리바 내부에선 한편으로 안도감도 들었다. 달러결제시스템에서 영구적으로 배제되는 최악의 경우는 모면했기 때문. 글로벌 은행으로선 사망선고나 마찬가지의 형벌이다.


미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큰 영향력을 휘두른다. 달러가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국제통화의 3가지 기능, 즉 회계단위와 교환매개, 가치저장수단에서 달러는 단연 최고의 위치다. 대부분의 상품 계약은 달러로 표시된다. 국제적으로 은행간 지급청구의 절반, 중앙은행 보유 외환의 62%가 달러다. 미국이 아무리 멍청한 실수를 한다 해도 달러의 매력을 감소시킬 수 없어 보인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때 모든 이들이 달러를 구하기 위해 북새통을 이뤘다. 월가가 문제의 근원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지난 3월 미국이 코로나19 위기에 엉성하게 대응하며 상황을 악화시켰을 때도 달러 쇄도가 재연됐다.

달러를 찍는다는 것

기축통화 발행국의 혜택은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거래비용이 크게 줄어든다. 은행들은 중앙은행의 유동성에 언제든 접근할 수 있다. 기업들은 해외에서 싸게 빌릴 수 있다. 환율 리스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둘째 거시경제적 유연성이다. 외부인에게 달러는 국제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매력자산이다. 하지만 외국인이 미국채를 소유하는 건 미국 입장에선 해외에서 대출을 해주는 것과 같다. 외국이 달러에 목을 맬수록, 미국은 자국민에게 덜 쓰라고 강제할 필요 없이 자국이 발행하는 달러로 적자를 메울 수 있다. 이는 벌어들이는 돈과 지출하는 돈의 균형을 이뤄야 할 기본적 필요를 줄인다. 미국이 통화·재정정책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게 해준다. 2011년 사상 처음 미국 정부의 신용등급이 강등됐을 때, 투자자들은 오히려 달러자산을 사들이려 야단법석을 떨었다. 덕분에 미 정부는 저렴하게 돈을 구할 수 있었다.

전 세계가 달러에 의존하게 될수록, 미국은 자율성을 얻게 된다. 이는 미 정부에 지렛대를 부여한다. 세 번째 혜택이다. 미국은 우방국들에게 긴급한 유동성을 제공하면서, 반면 적국에겐 달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서 자국이 원하는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다. 지난해 중국의 3개 은행이 대북 제재를 어겼다는 혐의를 받자마자, 신속히 규제를 준수하겠다고 약속했다. 달러의 위력은 국제적 규범에도 영향력을 미친다. 유럽 은행들은 BIS 자기자본비율이 미국 은행들보다 자신들에게 더 가혹하게 적용된다며 항의하고 있다.

혜택만 있는 건 아니다. 기축통화국이 되는 건 비용이 따른다. 달러에 대한 왕성한 수요는 다른 통화 대비 가치를 높인다. 미국의 수출기업들이 불이익을 받는다. 캘리포니아대 샌타바버라캠퍼스의 벤자민 코헨 교수는 "연방준비제도(연준)는 해외의 유동부채가 과도하게 늘어나는 것에 대처해야 한다. 자본의 갑작스런 움직임은 미 경제를 볼모로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연준은 또 긴박한 위기가 닥치면 글로벌 금융시스템을 구제해야 할 의무도 있다.

이처럼 달러라는 기축통화는 혜택과 비용이 맞물리는 트레이드오프(trade-off) 특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1980년대 경제가 급성장하던 일본이나 독일은 자국 통화를 글로벌 통화로 끌어올리기를 꺼려했다. 최근까지 유럽은 그런 입장에 있었다. 유로화를 통화동맹의 도구로 봤을 뿐 다른 나라들이 유로화를 어떻게 여기는지 별 관심을 안 뒀다. 그러나 유럽의 셈법이 변하고 있다. 미국의 계속 고립주의로 나아가면서 유럽연합(EU)은 통화 자율성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EU위원회는 2018년 유로화의 국제적 역할을 제고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유럽으로선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게 궁극적 목표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보유하는 외환통화 구성은 특정 통화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민간 투자자의 포트폴리오보다 편중성이 심하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즐겨찾는 통화가 되는 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수순이다. 이를 위해선 유동성이 풍부하고 광범위한 자본시장, 안전자산으로 간주되는 국채 등이 필요하다. 무역에서도 폭넓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중앙은행들은 자국이 수입할 때 지급 가능한 현금을 쌓아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과 통합된 규모 큰 경제를 갖는 것도 도움이 된다.

펀드매니저이자 환율전략가인 카틱 산카란은 "그런 측면에서 거대 석유회사 4곳과 태환가능한 통화, 거대한 국가간 금융시스템 등을 갖춘 EU는 황금기를 맞을 준비가 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원국 간 재정통합이 안된 EU로서는 초국적이고 유동적인 유로채권을 발행하기가 어렵다. 단일 회원국들이 발행하는 채권은 안전성 측면에서 균질하지 않다. 부실한 은행들과 허약한 각국 정부가 밀접히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은행들을 보통 자국 국채의 15~30%를 보유하고 있다. 금융통합이 그같은 악순환을 깨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EU 관계자들은 통합 프로젝트가 다소간 정체됐다는 점을 인정한다. 전 세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 구성에서 유로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28%에서 지난해 20%로 하락했다.

유럽은 땜질식 처방에 나섰다.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에 설문지를 보내 '유로화를 더 많이 사용하지 않는지'를 물었다. 올 3월엔 동유럽 국가들과 워크숍을 열어 유로채권을 어떻게 발행할지 논의했다. EU는 유럽의 정책은행들이 유로화 표시 채권을 더 많이 발행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하향식 노력은 별다른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유럽 은행의 한 CEO는 "내 주변을 돌아보면 모든 이들이 달러를 사용한다. 내가 아니라, 내 고객들이다"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더 과감하다. 2013년 이후 러시아중앙은행은 외환구성 중 달러 비중을 기존 40%에서 24%로 줄였다. 현재 러시아는 대개의 국채를 자국 루블화나 유로화로 발행한다. 러시아 ING은행은 지난해 수출 대금 중 달러결제 비중이 62%라고 밝혔다. 2013년 80%에서 하락했다. 러시아 매장 석유의 40%를 뽑아내는 로즈네프트는 미국의 제재대상에 오른 기업으로, 외국과 사업할 때 유로화로 거래한다.

중국의 금융 글로벌화

중국은 자국 위안화를 글로벌 통화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라 안팎을 오가는 돈을 통제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기에, 오랜 기간 자본통제 조치를 실시하고 있다. 외부인이 접근할 수 있는 위안화의 양이 제한된다. 따라서 위안화의 발전은 급진적이라기보다 점진적이다. 중국은 2000년대 홍콩 거주민들이 위안화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중국 본토 밖에서 위안화 유동성 풀을 만들기 위해서다. 또 외국 정부와 기업이 홍콩 채권시장에서 딤섬본드(위안화 표시 채권)를 발행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2015년 그같은 노력을 멈췄다. 당시 투기세력이 자본통제의 느슨함, 중국 경제에 대한 우려 등을 파고들었다. 인민은행이 1조달러의 외환을 투입해 이들과 싸워야 했다. 자본통제는 다시 강화됐다. 위안화로 결제되는 무역거래가 급감했다. 역외 위안화 예금도 타격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국제화를 이야기하면서 몽상을 꾸고 있다'고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현장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사실들에 주목해야 한다. 2015년 역외 위안화 예금이 타격을 입었지만 다시 신속하게 회복되고 있다. 현재 1조위안(1440억달러)을 넘었다. 2009년 대비 20배 늘었다. 타국에서의 위안화 유동성도 확대되고 있다. 대만의 위안화 예금은 홍콩 예금의 절반 정도에 달한다. 싱가포르와 런던의 위안화 예금도 증가하고 있다.

외환거래 활성화는 위안화 쓰임새가 점차 늘고 있다는 의미다. 홍콩의 하루 평균 외환거래량은 2013년 이후 2배 넘게 늘어 현재 1070억달러에 달한다. 다른 역외 허브들에서도 위안화 거래가 늘고 있다. 글로벌 위안화 거래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37%다. 프랑스와 미국도 두자릿수 비중이다. 역외 투자상품 중 위안화 표시가 늘어나고 있다. 투자자들 사이에서 위안화 이미지가 개선되는 효과를 낳는다. 노무라홀딩스의 크레이그 챈은 "홍콩에서는 상장지수펀드(ETF)와 주식, 금선물, 부동산투자신탁 등이 위안화로 표시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의 가장 주목할 만한 발전은 실세계에 있다. 중국은 위안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무역과 투자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일대일로 사업과 관련한 중국 기업의 직접투자는 지난해 150억달러에 달했다. 이 가운데 1/4은 위안화 표시다. 중국이 외국과의 무역에서 위안화로 거래하는 비중은 15%다. 2015년 11%에서 늘었다.

중국은 특히 신흥국에서 위안화 영향력을 늘리고 있다. 위안화 지급결제를 처리하는 전 세계 은행 숫자는 2017년 이후 50% 증가했다. 현재 2214개 은행이 위안화를 취급한다. 최근 추가된 은행들이 있는 지역은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다. 일부 유럽 국가들도 위안화 취급을 원한다. 프랑스가 특히 그렇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달러패권에 가장 비판적인 국가다. 중국과 프랑스의 교역 중 1/5, 지급결제의 55%가 위안화로 표시된다. 프랑스 정부는 자국 은행과 기업들에게 위안화를 적극 사용하라고 촉구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전 간부는 "프랑스 다국적기업 여러 곳이 미국 제재를 피해 위안화로 거래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중국은 더 광범위한 공세를 고려중이다. 25개국에 위안화로 청산결제하는 은행들을 지정했다. 중국은 또 필수 수입품을 위안화로 조달하려고 한다. 2018년 상하이에 위안화결제 원유선물을 출시했다. 외환거래업체 '악시코프'의 스티븐 이네스는 "중국 원유수입 업체들이 위안화로 거래하면서 환리스크를 헤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상하이 위안화 원유선물 시장은 출범 6개월 만에 세계 3대 시장에 올랐다.

HSBC는 지난해 중국 다롄의 상품거래소에서 외국인 선물 트레이더들의 예탁 증거금을 처리하는 첫 번째 외국계 은행이 됐다. HSBC의 위안화 전문가인 비나 청은 "중국은 외국 투자자와 트레이더들을 포용하는 인프라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국적 기업도 이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호주의 다국적 광업회사인 '리오 틴토'는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철광석 거래대금으로 위안화를 받았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 역시 위안화를 찾고 있다. 2016년 IMF 특별인출권 구성통화로 편입된 이후, 글로벌 외환구성에서 위안화의 비중은 매 분기 상승하고 있다. 지난해 9월 기준 2.1%다. 세계금협회 이사 나탈리 뎀스터는 "일부 중앙은행들은 중국의 자본통제가 해제되자 위안화를 사들이기 위해 금을 중간매개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8년 각국 중앙은행들이 47년 만에 가장 많은 금을 사들였다.

중국은 또 60여개국과 통화스와프를 맺었다. 액수로는 5000억달러 정도다. 일부 중앙은행들은 외환구성 중 10%를 위안화에 할당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약속이 현실화된다면 각국 중앙은행들이 보유하는 위안화 규모는 현재 2200억달러에서 8000억달러로 늘어나게 된다.

위안화의 위상 제고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첫째, 위안화는 전 세계 외환시장의 출렁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최근 IMF 소속 경제학자들의 연구논문을 보면, 전 세계 GDP에서 위안화 경제권의 비중은 30%에 달한다. 달러 경제권의 40% 비중에 이은 2위다. 각국 중앙은행들은 자국 경제와 긴밀히 연계된 나라의 통화를 중시한다.

둘째, 중국은 자본통제를 접고 다시 문호를 열고 있다. 덕분에 국제자본이 중국으로 흘러들고 있다. 2017년 중국은 '채권퉁'(Bond Connect)을 시작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홍콩을 통해 중국 본토의 채권에 투자할 수 있게 한 제도다. 그리고 투자 할당제를 폐지했다. 지난해 중국은 또 국제 신용평가기관의 자국 내 활동을 허용했다. 중국 내 상장주식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중국 기업에 대한 국제 신평사들의 평가가 가능해지면서, 전 세계 주요 금융정보 제공업체들이 중국 채권을 자신들의 벤치마크에 속속 편입시켰다. 이런 이유로 지난해 중국 국채에 몰린 외국계 자금은 600억달러나 됐다. 이런 흐름은 코로나19 위기도 막지 못했다. 현재 약 1900명의 외국 투자자들이 채권퉁에 등록했다. 1년 전 700명에서 껑충 뛰었다. 세계 2위 규모의 중국 채권시장에서 외국인 보유 비중은 현재 3% 정도다.

중국 국채의 경우 외국인 비중은 8.8%로, 2015년 2.8%에서 늘었다. 중국 채권에 대한 수요는 계속 오를 전망이다. 수익률이 상당할뿐더러 투자다각화의 이점도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마크 위드맨은 "하지만 기관투자자의 포트폴리오에선 중국 채권이 여전히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고 말했다. 블랙록은 고객들에게 중국에 투자하는 법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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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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