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

2020-05-14 12:32:01 게재
이보라 정오의 법률사무소 변호사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재판에서 1심 법원은 피해자에게 ‘피해자답게 저항하고 괴로웠는지’를 물었다. 강도나 폭행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저항을 하지 않더라도 이를 문제삼지 않는다. 이에 반해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을 할 것’과 ‘피해에 대해 힘든 모습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마치 조선시대에 정절을 잃을 위기의 아녀자가 은장도로 가해자를 힘껏 찌르거나 자결이라는 피해자다움을 보여주어 열녀문이라는 명예를 얻는 것처럼.

눈물 보여야 피해자인가

피해자의 성격, 행동, 이모티콘, 짧은 메신저 한마디를 뜯어내 정형화된 피해자의 모습에 일치하는지를 판단하고, 이 틀에서 조금이라도 엇나가는 경우 무고라는 평가를 씌운다. 피해자인데도 자기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거나 눈물짓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진정한 피해자인지를 의심받게 된다.

이런 관념에 따르면 피해자는 정형적으로 기대되는 모습, 즉 충격 수치심 분노 불신 좌절 무기력 두려움 공포 등 복잡한 심리상태여야 한다. 또한 이로 인해 일상생활이 어려운 것처럼 보여야 한다.

특히 성범죄자들의 감형 또는 집행유예 등의 양형 인자로서 ‘피해자와의 합의’ ‘피해자의 선처’가 그 이유로 적시되는 경우, 많은 이들이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곤 한다. 피해자가 금전을 목적으로 고소를 한 것이 아닌지, 피해자가 왜 피해자다움을 보이지 않는 것인지, 관용을 보여 오히려 성범죄자를 양산하는 것이 아닌지를 묻는다. 피해자가 느꼈을 절망감과 배신감, 두려움과 혼란, 자존감 상실, 가능한 빨리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리 등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형사사건에서 가해자가 혐의를 인정하지 않은 채 합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국 가해자의 합의금 지급은 본인의 행위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피해자에게 응당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는 함축된 의사로 볼 수 있다. 물론 반성과 사과 대신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가해자도 적지 않지만.

필자가 만난 다수의 성범죄 피해자들은 두 가지를 걱정한다. ‘피해 전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을지’와 ‘보복의 우려’다. 사건이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계속 진행 중인데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가해자와 합의를 하면 더 이상 피해사실을 다시 끄집어내 증명을 하거나 법정 등에 증인으로 출석해 다시 상황을 마주쳐야 하는 피해자의 고충을 생략할 수 있게 된다. 사건을 신속하게 종결시키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금전으로 피해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죄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금전 외에 이를 매개할 다른 수단은 없다. 합의를 요청한 가해자들 대부분이 합의금을 지급하고 사건과 단절하기를 원한다. 또한 피해자가 합의에 응해주지 않아 엄벌(보통은 실형)에 처해지거나 사회생활에 큰 지장을 입게 된 가해자일수록 앙심을 품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자다운 목소리 강요하면 안돼

우리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것은 ‘피해자다운’ 목소리를 내라고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 피해자가 언제까지나 충격 수치심 분노 불신 좌절 무기력 두려움 공포 등 복잡한 심리상태에서 의혹의 시선과 동정을 받게해서는 안된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크게 웃고 씩씩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피해자답지 않은 일상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