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윤찬식 주코스타리카대사

소수민족 정치인 탄생과 문화적 그릇

2020-05-18 11:49:15 게재

'코스타리카의 정주영 회장', 그를 이렇게 소개해도 될지 모르겠다. 지난 2월 지자체선거에서 우리 동포 김종관씨가 인구 3만의 도시 케포스(Quepos) 시장으로 당선되어 5월 1일 취임했다. 현직 시장과 엎치락뒤치락 하며 재검표까지 간 끝에 역전승이었다.

불과 49표 차이!

1968년 이민 이래 코스타리카 동포 역사상 최초의 선출직 도전, 최초 당선이라는 기록과 상징을 한꺼번에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70세 언저리인 김 시장은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37년전 코스타리카로 이민하여 건자재, 호텔 사업 등으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평화롭고 깨끗한 삶을 의미하는 뿌라 비다(pura vida)의 나라에서 편하게 사는 선택지가 있음에도 '할 일이 많다. 대한민국의 자존심으로 지역을 확 바꾸겠다'는 당선 소감이 보여주듯 열정적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현지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평한다.

'항상 눈빛이 살아있습니다.'

1948년 코스타리카 군대를 폐지한 선친과 함께 부자 대통령 당선 기록을 세운 호세 마리아 피게레스 전 대통령(1994~1998 재임)은 필자와 김 시장을 농장으로 초대하여 이번 당선을 축하하고 좋은 업적으로 연임까지 성공하는 시장이 될 것을 당부했다. 무엇보다 김 시장의 평판이 매우 좋다면서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은 출신과 언어구사력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외교관이 국제법적으로 주재국 정치의 연못에서 수영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전직 대통령이 소수민족 출신을 챙기며 힘을 실어주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지자체 발전과 사회연대경제 등을 총괄하는 마빈 로드리게스 부통령에게도 이 당선소식을 알리고 각별한 관심을 요청했더니 대환영이란다.

취임에 맞추어 400여명 한인사회도 께포스에 코로나 마스크 기증을 통해 동고동락의 체온을 전했다. 식민지 시대 원주민 부족 이름이기도 한 께포스는 산과 바다, 열대림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생물종다양성을 자랑하며, "마누엘 안토니오" 국립공원으로 유명한 태평양 해변 관광도시이다. 이 일대에 톱스타 등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이 방문했다는 현지뉴스가 자주 보도된다.

흥미롭게도 께포스에는 약 500여명 학생의 '대한민국학교(Escuela Republica de Corea)'가 있다. 기존 현지 초등학교 이름을 코스타리카 정부가 1983년 특별히 바꾼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운명적으로 우리 대사관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이런 께포스와의 교류협력에 대해 우리 지자체, 학교, 북미 동포사회 등의 관심이 있다면 대사관은 적극 지원할 것이다.

재외동포들의 정치력 신장과 거주국 발전에 기여하는 건 우리들의 바람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사회문화적 소수자들의 권익을 담아내는 우리 스스로의 그릇과 거울은 얼마나 클까? 예컨대 귀화 국민들이 능력과 필요에 따라 곳곳에 차별없이 진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인권이며 민주주의다. 개방성·다양성·포용성 가치들이 살아 숨 쉬는 공동체라면 편견·차별·배제 등의 앙시엥 레짐을 없애야 한다. 이를 위해 글로벌 눈높이와 기대에 부응하도록 우리의 법제도 정비와 함께, 소수자들에 대한 적극적 배려정책(affirmative action)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디아스포라들도 태평양처럼 문화적 그릇이 큰 곳으로 계속 뻗어나가며 풍요로운 기획과 약속을 하길 상상해 본다. 그리고 이렇게 미소짓기를 응원한다. 나는 할 수 있었고, 해야 했으며, 결국 해냈다(potuit, decuit, ergo fecit)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