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와 금융회사의 본격화된 경쟁 | ② 기울어진 운동장 논란

과거에 만든 금융규제체계, 빅데이터·AI시대 맞게 재설계 필요

2020-12-16 12:14:26 게재

금융당국, 금융회사 건의 받아 개별 대응 … "큰 그림 어떻게 그려야할지 고민할 시점"

빅테크 기업의 금융업 진출이 확대되면서 강한 규제를 받고 있는 금융회사들과 달리 규제의 사각지대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금융당국은 빅테크·핀테크 기업들과 기존 금융회사와의 상호 상생을 위해 올해 9월 디지털금융협의회를 출범하고 규제 개선작업에 착수했다.

이달 10일 열린 5차 회의에서 금융당국은 금융회사들이 제기한 건의사항에 대한 답을 내놨다. 은행이 플랫폼을 기반으로 음식주문이나 부동산서비스, 쇼핑 등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을 포함해 금융권에서 제기한 62건 중 40건을 수용했다고 밝혔다.


반면 빅테크에 대해서는 금융플랫폼의 영업행위 규제체계를 마련하기로 했다. 금융당국은 "빅테크 플랫폼 기업이 기존 금융회사와 연계·제휴 등을 통해 금융업에 활발히 진출함에 따라 시장지배력 남용, 이용자 피해 등의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금융회사에서 제기한 개별 건의사항에 대해 대안이 제시되기는 했지만 중장기적인 제도개선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금융위는 "디지털금융 규제·제도개선 사항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며 "구체적인 사례, 영업방식 등을 기반으로 현장 이해도가 높은 업계, 전문가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개선방안을 강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16일 정순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통적인 금융업인 은행 증권 보험 등으로 구분해온 현행 금융규제 체계의 경계를 기술 발전을 통해 빅테크들이 넘어서고 있다"며 "과거 70년대 기술에 기초해서 형성된 현재의 규제법 체계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에 기초한 새로운 기술 환경 하에서도 유지될 수 있을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빅테크에 풀어준 '금산분리 완화', 금융권은 규제 = 정 교수는 "빅테크와의 규제차익을 없애기 위해 기존 금융회사에 대해 뭘 더 해줘야 하느냐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깊이 고민할 것은 금융규제 체계의 큰 그림을 앞으로 어떻게 그려야 할지의 문제"라고 말했다.

가장 큰 쟁점은 '금산분리 규제완화' 이슈다. 금융회사들이 빅테크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기술력을 가진 비금융자회사를 인수해 플랫폼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하지만 현행법으로 지분 소유에 제한이 있다.

금융당국은 인터넷전문은행 인가를 내주면서 산업자본(비금융주력자)의 은행업 진출을 허용해주는 특례법을 추진했다. 국회는 2018년 인터넷전문은행특례법안을 통과시켰다. 산업자본의 인터넷전문은행 지분 상한을 기존 은행법 기준 10%(의결권 있는 주식은 4%)에서 34%(의결권 주식 포함)로 늘렸다. 정보통신업(ICT) 자산 비중이 50%가 넘는 ICT 주력 기업에 한해 특혜를 준 것이다.

반면 은행의 비금융자회사 지분 소유는 은행법에서 제한하고 있다. 은행법 37조는 '은행은 다른 회사 등의 의결권 있는 지분증권의 15%를 초과해 소유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기술력을 가진 비금융 자회사를 소유하지 못하면 플랫폼 경쟁에서 빅테크에 뒤쳐질 수밖에 없다. 금융그룹 지주사들의 비금융 자회사 지분 소유도 금융지주회사법으로 제한돼 있다. 금융회사의 인수합병 등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은 금융업권 전체에 대해 다른 회사의 인수를 제한하고 있다.

금융회사들은 "금융회사의 핀테크기업에 대한 지분 취득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며 금융당국에 건의했다.

금융위는 이에 대해 "이미 지난해 '금융회사의 핀테크 투자 등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금융회사가 핀테크 기업에 출자하거나 핀테크기업을 자회사로 소유할 수 있음을 명확히 했다"고 밝혔다.

법개정인 아닌 가이드라인을 통해 기술력 있는 핀테크기업을 금융회사들이 인수할 수 있도록 길을 터놨다는 것이다. 실제 가이드라인에는 금융회사가 핀테크기업에 출자하거나 그 핀테크기업을 자회사로 소유하는 것과 관련한 사전승인 등의 특례 조항이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금융회사의 핀테크 투자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비금융 자회사 소유를 허용하는 우회로를 만들어놨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법제도를 정비하는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갈등 피해 우회로 택한 금융당국, 안 움직이는 금융회사 = 금융당국이 법개정이 아니라 가이드라인을 선택한 것은 '금산분리 규제완화' 논의가 우리사회에서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금산분리 논의가 시작되는 순간 금융회사의 비금융자회사 소유 문제는 몇 년 후로 늦춰질 것"이라며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이드라인은 금융회사 전체에 적용되는 금산법을 비롯해 각 업권별로 은행법과 보험업법, 금융지주회사법, 상호저축은행법, 중소기업법과 산업은행법의 시행령까지 포괄해 금융회사의 핀테크기업 소유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금산분리 규제완화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우회로를 택했지만, 금융회사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금산법이나 은행법에서 금융위 승인을 받으면 금융회사도 핀테크회사의 지분을 소유할 수 있는 만큼 가이드라인을 통해 인수가 가능하다는 점을 여러 차례 설명했지만 실제로 신청한 사례가 없다"며 "금융회사들이 규제완화 주장만 할뿐 빅테크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위는 공개적으로 "가이드라인 제정 후 금융권이 핀테크기업 출자를 위해 금융감독원에 신청한 사례가 저조한 상황으로 금융권의 핀테크 투자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기존 금융회사들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업권별 규제 → 기능별 규제' 전환 논의 = 현재 은행과 보험 등 업권별로 구성된 금융규제 체계를 전체적으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금융당국은 금융소비자들이 플랫폼을 이용해 보다 편리하게 금융생활을 할 수 있도록 종합지급결제업을 도입하기로 했다. 종합지급결제업은 간편결제와 송금 이외에도 모든 전자금융업 업무를 할 수 있고 사업자가 이용자 계좌를 직접 보유하면서 급여이체, 카드대금·보험료 납입 등의 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다. 종합지급결제업자는 여수신 기능이 없는 지급·결제 목적의 계좌를 고객에게 발급해 이를 기반으로 다른 금융서비스를 겸영하기에 용이하다. 따라서 금융회사와 핀테크·빅테크 모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서정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종합지급결제업은 계좌기반 영업을 하는 금융회사 업무와 유사한 점이 많아 겸영·부수업무의 범위 및 건전성 규제 등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규제의 사각지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도 "금융피해가 발생했을 때 소비자보호 측면에서 문제가 될 부분이 없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금융서비스가 등장할 때마다 기존 규제체계로는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김동환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본 금융청은 '금융환경의 변화에 대응해 기능별·횡단적 금융규체 체계로 전환하는 방안'을 2018년 발표했다"며 "금융서비스를 크게 '결제, 대출, 투자·자산운용, 위험이전의 4가지 기능'으로 구분하고 각 기능을 중심으로 '동일기능. 동일위험, 동일규제' 원칙을 구현하는 규제체계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금융규제 체계 재정립의 배경은 현행 권역별 규제를 핵심업무 중심의 기능별 규제로 전환하고 핵심업무를 분할해 디지털화, 분산화 추세에 상응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도 "금융상품이나 서비스가 수행하는 기능을 출발점으로 하는 기능별 규제로의 전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며 "금융규제를 통해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을 수 없고 기술의 발전과 그 결과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로 제도를 설계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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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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