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에 누운 취객 친 '뺑소니' 무죄

2021-05-27 11:30:11 게재

"비오는 야간 안 보여"

택시기사 주장 인정

전·후방 블랙박스에 다른 영상

택시 기사가 술에 취해 도로에 누워있던 취객을 치고 도주(뺑소니) 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가 선고됐다. 야간이고 비가 오고 있던 상황에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였다.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5단독 고소영 판사는 최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치상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택시 기사 A씨에 대해 공소를 기각했다.

A씨는 2020년 8월 서울 강남의 한 도로에서 택시를 운전하던 중 횡단보도를 넘어 유턴을 하면서 술에 취해 도로 위에 쓰러져 있던 B씨를 발견하지 못한 채 역과(깔고 지나감)하고 도주(뺑소니)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B씨는 이 사고로 전치 14주의 상해를 입었다. A씨는 당시 B씨와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으므로 도주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고 판사는 사고 당시를 재현했다. 자정을 넘긴 때라 어두운데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어 운전자로서는 시야 확보가 쉽지 않았다. A씨는 편도 3차로에서 2차로를 따라 진행하던 중 반대편에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유턴한 뒤 3차로로 진행하던 중 사고를 냈다.

검찰은 A씨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을 주요 증거물로 봤다. 당시 블랙박스에는 B씨가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고 판사는 블랙박스 전방 카메라와 후방 카메라 영상을 비교했다. 전방 카메라에는 B씨가 보이는 반면 후방 카메라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전방 블랙박스 카메라에 탑재된 '나이트비전' 기능 때문이다. 이는 녹화 영상 자체가 실제보다 더 밝게 보이는 것으로 사람의 시야와는 차이가 있다. 블랙박스 업체들이 주행 또는 주차중 사고시 사고 영상을 제대로 확보하기 위해 화질개선 기능을 탑재한 것이다.

고 판사는 "당시 사고 현장에는 배전반 시설과 쓰레기 더미, 오토바이 등이 세워져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면서 "A씨는 B씨 모습을 식별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왕복 6차로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것 역시 쉽게 예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택시 실내 영상도 A씨에게 유리하게 해석됐다. 택시나 버스 등 실내에는 운전자 폭행 등을 예방하기 위해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A씨 택시 안에도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사고 직후 영상에서 A씨는 사고를 전혀 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유턴을 한 그는 차로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선 "에이, 안 탈 사람들이네"라고 중얼거렸고, B씨를 역과해 차가 크게 덜컹거리자 놀라는 기색도 없이 "덜컹거리네"라고 중얼 거렸다. 백미러를 다시 확인했지만, 보이는 것이 없자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사고 현장을 지나던 목격자들도 법정에서 비슷한 증언을 이어갔다 "(B씨가) 잘 안보인 것은 사실일 것"이라며 "쿵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검사가 "야간이고 어둡다보니 못 볼 수도 있다는 취지로 진술하는 것인가요"라고 묻자 "맞다"고 답했다.

A씨는 사고 이후에도 6명의 승객을 태우는 등 정상적인 택시 영업을 했다. 차량에는 훼손된 흔적도 없었다.

A씨는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블랙박스 영상 및 주행기록 미터기 등을 수사기관에 제출하는 등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사설감정기관에서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받아 그 결과를 제출하기도 했다.

고 판사는 "A씨는 당시 택시 영업을 하고 있고 음주 등 법위반 사실도 없어 굳이 도주할 이유가 없었다"면서 "피해 변제를 이유로 도주할 동기도 없어, 범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고 판사는 A씨에 대해 도주 치상 혐의는 무죄로 보고,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상 혐의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며 공소를 기각했다.

택시기사 A씨를 대리한 법무법인 일원의 정 철 변호사는 "사고에 고의가 없다는 점을 인정해 도주가 성립하지 않았다"면서 "재판부가 법리를 충실히 해석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검찰은 이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오승완 기자 osw@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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