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가세 조기환급 악용 일당 줄줄이 유죄

2021-06-23 10:55:48 게재

세무당국, 고발 아닌 수사의뢰해 반쪽 처벌 … 전직 세무공무원, 감옥서 수법 전수 '충격'

신용카드 전표를 위조해 부가가치세 조기환급을 받아낸 일당이 항소심에서야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조세당국과 검찰이 이들을 조세범처벌법으로 기소하지 않아 반쪽 처벌에 그쳤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서울고등법원 형사11-3부(황승태 부장판사)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사기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김 모씨에게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김씨의 범행을 도운 일당 8명에게는 징역 6개월~2년에 집행유예 2~3년 또는 벌금 400만원이 선고됐다.

1심에서는 주범인 김씨와 임 모씨만 징역형이, 나머지는 무죄가 선고됐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나머지 모두에게 유죄 판결이 나왔다. 주범도 가중처벌 됐지만 핵심 혐의는 공소가 기각되고 잡범이나 다름없는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만 인정됐다.

◆신용카드 전표 위조 = 김씨 일당은 부가세 조기환급제도의 빈틈을 노렸다.

부가세 조기환급제도는 부가세를 확정할 때 매출세액을 초과하는 매입세액(사업자금 지출)을 환급하는 혜택을 말한다. 주로 소상공인 등 자영업자들이 부가세를 예정신고하면서 매출보다 지출이 많을 경우 확정신고 전 부가세 환급분을 돌려받는다. 자영업자들은 법인 통장의 잔고나 법인카드 한도가 많지 않아, 급한 경우 법인 대표의 개인 신용카드를 사용한다. 국세청은 법인 대표의 신용카드 전표를 검토해 부가세 환급대상일 경우 조기 환급해준다.

문제는 일선 세무서가 환급 세액이 크지 않을 경우 세부내역에 대한 소명을 요구하지 않는데 있다. 부가세 조기환급기간이 정해져 있어, 자금 사정이 어려운 자영업자들의 신청이 밀려들기 때문에 세세하게 보기 어려운 사정도 있다.

김씨는 법인 대표 명의의 신용카드 전표를 위조한 뒤 이를 세무서에 제출했고, 존재하지도 않는 지출에 대해 부가세를 환급받아 가로챘다.

김씨 일당의 범행에 일선 세무공무원은 "실제 세무서 업무 중에서도 부가세 환급 업무에 정통한 세무공무원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이라며 "내부 결탁이 없고서는 범행이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지방세무사회의 연구이사는 "종전의 세금 탈루는 가공 매출 등 이른바 자료 거래에 의한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법인 대표 개인신용카드 위조는 신종수법"이라며 "영세한 자영업자들의 숨통을 트여주는 정책을 악용했다"며 범행 수법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 감옥에서 범행 수법 배워 = 문제는 김씨가 세무행정과 관련 없고, 일당 중에는 세무공무원이나 세무사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범죄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주범인 김씨는 2016년 2월부터 사기죄 등으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은 뒤 인천구치소에 수감됐다. 그는 구치소에서 전직 세무공무원 출신인 A씨와 친해지면서 부가세 조기환급 제도 빈틈을 알게 됐다.

A씨는 2014년부터 일선 세무서에서 부가세 환급 업무를 하다가 허위로 100억원대 부가세 환급을 받아 기소돼 1·2심에서 징역 10년에 벌금 200억원 등을 선고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씨는 A씨로부터 범행수법을 전수받았고, 2017년 출소하자마자 바로 범행에 나섰다.

김씨는 1년여간 28차례에 걸쳐 8100만원의 부가세 조기환급금을 일선 세무서로부터 수령했다. 이어 임 모씨와 노 모씨를 자신의 범행에 끌어들여 범행 규모를 키웠다. 이들은 다시 이 모씨 등 6명에게 유령사업자 모집을 지시했다.

유령사업자란 사업자등록증은 있지만 실제로 사업을 하지 않는 이들을 말한다. 이씨 등은 직접 사업자등록을 내거나 유령사업자 1개의 법인 통장과 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OTP) 등을 구해왔고, 사업자 명의 1개당 한달에 50만~100만원씩 이익을 나눠가졌다. 범행에 사용된 업체는 주로 인천과 김포, 의정부 등의 옷가게들이었다.

김씨 일당은 유령사업자의 대표명의 신용카드 전표를 컴퓨터로 위조했다. 거창한 그래픽 프로그램이 아닌 컴퓨터 운영체제에 기본으로 들어 있는 '그림판' 프로그램만 가지고도 전표를 위조했다. 이를 세무서에 제출하는 방식으로 부가세를 조기환급 받았다. 이들은 2년간 109차례에 걸쳐 세무당국을 속였고 4억2000만원이 넘는 돈을 받아냈다.

하지만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29차례에 걸쳐 1억2000만원 가량의 조기환급금을 받아내기 위해 제출된 서류는 담당 세무공무원이 허위라는 것을 알아채면서 거부당했다.

김씨 일당의 수상한 움직임에 인천지방국세청은 인천지방검찰청에 수사의뢰를 했고, 수사에 착수한 인천지검이 이들의 덜미를 잡는데 성공했다.

◆기소부터 삐거덕 = 2020년 5월 인천지검은 김씨를 특경가법상 사기와 사기미수 사문서위조 및 행사,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으로 기소했다. 임씨와 노씨는 사기와 사기미수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를, 유령사업자를 모아온 이씨 등에게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과 사기방조를 각각 적용했다.

1심 사건을 맡은 인천지방법원 형사합의15부(표극창 부장판사)는 2020년 10월 주범 김씨의 사문서위조와 위조사문서행사 혐의만 유죄로 판단하고 나머지 특경가법상 사기와 사기 미수,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의 혐의를 모두 무죄로 본 뒤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공범 중 핵심인 임씨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지만 노씨와 이씨 등 다른 공범들에게는 무죄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조세를 강제적으로 징수하는 국가의 권력작용에 대한 침해는 개인의 재산권 침해와 동일하게 평가할 수 없다"며 "사기나 부정한 행위로 조세 환급을 받은 경우 조세범 처벌법에 별도 처벌 규정이 있으므로 이를 형법상 사기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세금 탈루 등 조세포탈 사범은 조세범처벌법상 국세청 등이 고발을 해야만 검찰이 기소할 수 있다. 인천국세청이 '수사의뢰'만 했기 때문에 조세범으로 처벌할 수 없고, 사기죄도 적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어찌됐건 검찰은 1심 판결에 대해 법리오해 및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했고, 이 사건은 서울고법에서 다시 심리됐다.

◆공소장 변경해도 처벌 불가 = 검찰은 항소심에서 김씨의 특경가법상 사기 혐의에 조세범처벌법 위반을 예비적 공소사실로 적용해 공소장을 변경했다. 법정에서 인천국세청의 고발장을 받아오겠다며 처벌 의지를 높였지만 항소심 재판부 판단도 1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국가 등을 상대로 한 사기범죄는 특별관계에 해당하는 처벌 규정을 별도로 두고 있지 않는 한 사기죄가 성립할 수 있다"면서도 "조세범처벌법에 이런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별도로 두고 있어 사기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항소심에서 검찰은 수사의뢰와 고발이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재판부는 "조세범처벌법에는 수사의뢰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고발과 수사의뢰를 동일시하기 어렵다"면서 "조세범은 고발권을 부여받은 자에 의한 고발만이 소추요권"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인천국세청의 수사의뢰에는 김씨 일당의 처벌을 희망한다는 내용이 없다"면서 "세무조사를 벌인 인천국세청은 조세범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고발이 아닌 수사의뢰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조세범처벌법에 대한 공소는 고발 없이 제기된 것으로 무효에 해당하므로 공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1심에서 무죄로 판단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에 대해서는 모두 유죄로 봤다. 이에 따라 김씨 등에 대해 형량을 높였다.

국세청 관계자는 "당시 인천국세청은 일당의 조속한 검거를 위해 인천지검의 지휘를 받아 수사의뢰를 했다"며 "관련 판례를 종합해 검토한 결과 조세범 처벌이 아닌 사기로도 충분히 처벌이 가능하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인천국세청과 검찰의 기대와 달리 1·2심 재판부는 사기로 처벌하는 게 무리라고 봤다.

검찰은 물론 김씨 등은 항소심에도 불복해 상고했고, 서울고법은 22일 이 사건을 대법원으로 넘겼다.

한편 김씨 일당의 범죄로 인해 자영업자를 돕는다는 부가세 조기환급 제도 운용 감독이 강화됐다. 종전에는 담당 세무서 직원이 재량껏 부가세 조기환급을 해줬지만 전국적으로 업무 절차가 강화되면서 상급자의 승인 없이 조기환급이 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오승완 · 인천 김신일 기자 osw@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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