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진실을 찾아 ③ | 분단반대파 제거

해방 후부터 6.25까지 현대사 비극에는 '미국의 그림자'

2021-09-16 00:00:01 게재

미군정장관 하지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 차원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라는 지시를 한국에 진주하기 이전에 받았다. 하지 그리고 하지의 정책보좌관 베닝호프 및 랑돈과 같은 사람들은 한반도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남한 지역에 반공성향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여수-순천 사건 진상규명 관련 법안 토론 | 더불어민주당 소병철 의원이 6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여순-순천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안 처리에 앞서 찬성토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같은 측면에서 하지는 반공성향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작업에 곧바로 착수했다. 일제 당시부터 공산주의자들과 견원지간의 관계에 있던 친일인사 중심의 정당, 군대, 경찰, 검찰을 조직했던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최대한 5년 동안의 신탁통치 이후 한반도를 통일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를 무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한반도를 분단시키기 위한 미군정의 노력에 대항해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73년의 한, 이제야... | 6월 24일 전남 순천시 왕조동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에서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순천역 철도원으로 근무하다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잡혀가 희생된 김영기(당시 23)씨의 아들 규찬(73·왼쪽 두번째)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소감을 밝히고 있다. 순천=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트루먼 중심의 미국은 이들 사건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주요 이유는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태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없게 되면서 자국의 대소 봉쇄전략이 어려워질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자주통일국가 염원 물거품으로 = 미군이 한반도에 진입한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15일까지 남한지역에서 한 일은 반공 성향의 단독정부 수립이었다. 이를 위해 하지와 그의 보좌관들은 1945년 4가지 일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첫째, 38선을 지키기 위한 육군 조직 편성, 둘째, 남한지역 치안을 담당할 경찰조직 강화, 셋째, 우익정당과의 연대 강화, 넷째, 이 같은 미국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조선인 세력 진압.

이 같은 하지의 노력으로 6.25전쟁 직전 까지 남한 지역이 강력한 반공국가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하지는 상해임시정부는 물론이고 건준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들이 한반도 통일정부수립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기 이전인 1945년 9월 6일 여운형은 좌우합작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으며, 9월 14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친일세력 제거와 한반도 단일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선 내부의 일본제국주의자, 이들의 잔존세력, 반민주적 정파, 반동분자, 건전하지 못한 외세를 타파한 후 우리의 완벽한 자율성과 독립을 보장할 것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진정 민주적인 국가를 수립할 것이다."

1946년 8월 미군정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71%가 정부수립 조건으로 남북통일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미군정과 한민당의 결탁 = 이 과정이 순탄했을 리 만무하다. 수십 년 동안 목숨 걸고 일제와 싸워온 독립운동가들과 애국지사들이 미군정의 뜻대로 움직이거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외세를 몰아내고 진정한 자주통일국가 설립을 열망했다. 이는 미국이나 소련의 정치적 이해와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 특히 하지를 중심으로 한 미군정은 남한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력을 끝까지 행사하기를 희망했다. 그런 측면에서 1945년 9월 16일 우익세력들이 주도해 만든 한국민주당(한민당)은 미군정이 활용하기에 매우 좋은 면면을 갖췄다. 이들은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을 비난하는 대신 미군정과 처음부터 함께하기를 희망했다.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이나 하지의 정치자문관인 미 국무성 베닝호프, 그리고 미 24군단 정보부서 수장인 세실 니스트는 이들을 매우 좋아했다. 한민당 창당 과정부터 미국의 입김이 사실상 작용했던 것이다. 이들이 일제에 부역했고, 지주계급이었던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민족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과 달리 이들은 미국의 이해에 철저히 따르는 충성스러운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배닝호프는 "한민당 소속 요원들이 조선독립을 포기할 정도로 미국의 계획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듯 보인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와는 전혀 다른 흐름도 있었다. 광범위한 지지를 받던 건준에 이어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까지 선포했지만 미군정이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단독선거가 치러지기 한 달 전인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가 열렸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원봉 등 남북한 지도자 수백명이 참가했고, 4김회의와 남북지도자협의회를 거쳐 4월 30일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채택했다.

성명서는 ①외국 군대 즉시 동시 철거 ②외국군 철수후에도 내전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③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④단선단정 반대와 불인정이라는 4가지 원칙이 담겼다. 이에 따라 남북에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반대 운동이 전개됐지만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반대세력에 대한 대량학살 자행 =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조선인들은 미군정 기간 동안 전혀 다른 현실을 목도했다.

1945년 9월 8일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은 일제 유산을 그대로 유지했다. 일제에 부역했던 지식인 중심의 한민당을 지원했고, 일제 당시의 조선인 검찰, 경찰, 군인을 중심으로 남한지역을 관리했다.

해방으로 바뀐 것은 남한지역의 주인이 일제에서 미국이 됐다는 사실 뿐이었다. 저항은 필연이었고, 커다란 희생이 뒤따랐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비극이 대부분 이때 벌어졌다. 1946년 대구 10.1사건, 1948년 제주도 4.3사건, 같은 해 10월 19일 여순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사건들은 대부분 한반도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 그리고 미국과 같은 외세를 철수하기 위한 성격이었다. 이들 사건에 관련있는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한 뒤 6.25전후에 대거 학살한 사건까지 포함하면 한국현대사의 최대 비극이자 민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이 기간에 일어났다.

이들 사건들로 이미 6.25 이전에 남한지역에서 적게는 10만명 이상 많게는 20만명 가까운 인명이 희생됐다는 분석도 있다.

더구나 대량 학살은 미군정의 직접 개입이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진 것 들이었다. 미군정 시기였던 1948년 8월 15일 이전에는 미국 주도로 미군정이 직접 진압과 학살을 자행했고,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8월 15일 이후에는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이 진압을 주도했다.

한국군과 경찰은 미군정 시기는 물론이고 미군정이 끝난 뒤에도 미군의 작전 통제를 받았다. 일례로 1950년 8월 초순 대전에서 7000명에 달하는 보도연맹 인사에 대한 학살은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요원들의 지시와 감독 아래 한국경찰이 자행한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알란 위닝턴이 런던데일리워커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해외에도 알려졌다.

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시 학살을 목격한 증인들에 따르면 2대의 지프차로 이동한 미군장교 들이 학살현장을 감독했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출신의 도널드 니콜스는 본인이 공산주의자란 혐의를 받고 있던 한국인들을 고문 및 학살하는 과정에 동참했다고 말하면서 이 같은 고문과 학살에 미국이 암묵적으로 지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의 정세와 역학 관계를 볼 때 학살의 더 큰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이 계획을 수립하고 지시했고 이를 한국 경찰과 군이 이행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를 둘러싸고 지난 수십년 동안 두 가지 양극단이 나타났다. 보수진영에서는 북한이나 소련의 사주와 실질적인 개입에 의한 공산주의자들의 발호라고 주장하며 당시 진압과 학살이 정당성을 부여받은 것처럼 해석했다.

하지만 해방 직후 우리 사회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일제에 저항해 온 민족주의와 큰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이었고 대중적 지지도 상당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 진보진영에서는 현대사의 비극을 이승만을 비롯한 당시 독재정권에만 책임을 물었다. 그런데 앞서 살펴봤듯이 책임의 무게를 따진다면 미국과 미군에게 훨씬 더 큰 죄가 있다는 게 중론이다. 이를 빼고 살펴보다 보니 지난 수 십 년 동안 제주 4.3사건이나 여순사건 등은 제 대로 된 진상규명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위기를 팔아 사익을 챙겨서야 = 유명한 냉전 전문가 제임스 어빙 매트레이는 한국사회의 단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 적이 있다. "정치권력을 놓고 벌어지는 한국 내부의 투쟁은 국가 사회 또는 이념차원의 목표달성을 위한 것이 아니고 개인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한 성격이다 … 한국 특유의 이 같은 정치 및 사회적 성격을 이해하지 않고는 국가지도자들이 외세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과 명성을 추구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경향을 어느 누구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세계적 인류학자 노암 촘스키도 2016년 한겨레 인터뷰에서 "남한 내 미국 이익을 보호하는 보수·수구 세력, 권위주의·반민주 정권이 건재하다"면서 "남한의 보수 정권이 남북 평화정책을 펼 이유가 없다. 늘 외부로부터 위기를 받고 있다는 점을 부추기며 위기의식을 일깨우는 것이 보수에 이익이 되고 기득권 수호에 중요하다. 끊임없는 전쟁 상태, 테러와의 전쟁이 기득권에 유익한 것과 비슷하다"고 일갈한 바 있다.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해방되자 미군정을 위해 일하고 6.25전쟁 이후에는 미국의 생각이나 정책 방향은 절대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며 더욱 신성시하고 있는 국내 보수진영의 왜곡된 인식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전작권 전환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2000년대 중반 예비역 장성들 대부분이 전작권 전환에 반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방 후 벌어졌던 현대사의 주요 비극들은 공산 세력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이런 흐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소련이 아니라 중국과의 패권경쟁 전략경쟁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미국의 이익이 아닌 우리의 국익을 추구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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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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