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수대상 아닌 임의제출 정보 "증거능력 인정 안돼"

2021-11-19 12:02:24 게재

대법원 전합, 압수수색 범위 엄격 제한

"다른 범죄 발견시 별도 압수절차 거쳐야"

임의제출된 정보저장매체에서 압수 대상 범위를 초과해 취득한 정보가 다른 범죄의 증거로 인정될 수 있을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위법수집증거에 해당돼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만약 휴대폰 안에서 다른 범행의 단서가 발견됐다면 수사기관은 법원으로부터 별도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피의자의 참여권을 보장해야 범죄 혐의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만취한 제자들의 성기를 수차례 만지고 촬영한 혐의(준강제추행,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로 재판에 넘겨진 A씨의 일부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19일 밝혔다.

◆"참여권 보장했어야" = 대학교수인 A씨는 2014년 12월 제자 B씨가 술에 취해 잠든 사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신체를 몰래 촬영하다 발각됐다. B씨는 현장에서 A씨의 휴대전화를 뺏어 경찰에 임의제출했다.

경찰은 휴대전화에서 B씨에 대한 범행 관련 사진 등을 확보한 후 A씨의 참여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채 휴대전화의 전자정보를 탐색하다 A씨가 2013년 다른 학생을 대상으로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을 확인하고 사진으로 출력해 증거로 삼아 B씨의 사건과 함께 넘겼다.

1심은 2013년과 2014년 범행을 모두 유죄로 인정해 A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고 40시간 성폭력범죄 재범예방 수강을 명했다.

반면 2심은 "2014년 범행 증거 확보를 위한 탐색 과정에서 이와 무관한 2013년 범행 증거를 발견했다면 그 즉시 탐색을 중단하고 영장을 발부받아 A씨의 참여권을 보장했어야 했다"며 2013년 범행의 증거능력을 부정해 무죄를 선고하고 2014년 범행만 유죄로 인정해 벌금 300만원을 선고하고 2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했다.

◆"별도 혐의에 대해 영장 발부 받아야" = 대법원은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회부해 논의한 후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상고를 기각했다.

전원합의체는 "피의자가 소유·관리하는 정보저장매체를 피해자 등 제3자가 제출한 경우, 저장된 전자정보의 제출범위에 관한 특별한 의사표시가 없다면 전자정보의 제출 의사를 압수의 동기가 된 범죄혐의사실 자체와 구체적·개별적 연관관계가 있는 전자정보로 제한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정보저장매체 탐색·복제·출력시 피의자에게 참여권을 보장하고 압수한 전자정보 목록을 교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임의제출된 정보저장매체에서 압수의 대상이 되는 전자정보의 범위를 넘어 수사기관 임의로 전자정보를 탐색·복제·출력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위법한 압수·수색에 해당하므로 허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만약 탐색 과정에서 별도의 범죄혐의를 우연히 발견했다면 수사기관은 추가 탐색을 중단하고 법원으로부터 별도의 범죄혐의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사전 영장 없이 사후에 영장을 발부받거나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이를 증거로 하는데 동의했다고 해서 위법성이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라면서 "A씨의 2013년 범죄에 무죄를 선고하고 2014년 범죄는 유죄로 판단한 원심판결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압수수색 적법성 논란 지속 = 한편 수사기관이 집행한 압수수색의 적법성을 놓고 당사자 사이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자녀 입시비리'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 사건은 물론 최근 공수처의 대검찰청 대변인 공용 휴대전화 포렌식 자료 확보 과정에서도 위법성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정 전 교수 사건 관련, 정 전 교수 측은 2019년 동양대 조교 김 모씨로부터 강사휴게실 PC를 임의제출 받을 당시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며 "위법수집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PC 속 전자정보의 실질적 소유자인 정 교수 등의 참여권 보장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저장매체의 기록 열람·복사가 이뤄졌다는 뜻이다. 다만 정 교수 사건에서는 PC가 정 교수 소유가 아니고 제출자가 동양대 물품관리 책임자였으나 이 사건에서는 휴대폰이 개인 소유이며 제출자가 피해자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최근 공수처의 대검찰청 대변인 공용 휴대전화 포렌식 자료 확보 과정을 둘러싸고 압수수색의 위법성이 논란이 되고 있다.

대검찰청 감찰부는 지난달 29일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해 대검 대변인 공용폰을 임의제출 형태로 압수했고, 일주일만인 이달 5일 공수처는 감찰부를 압수수색해 해당 기록을 확보했다.

공용폰은 서인선 현 대검 대변인을 비롯해 이창수·권순정 전 대변인이 사용한 휴대전화로, 그중 윤석열 전 검찰총장 재직 시절 대변인으로 일했던 권순정 부산지검 서부지청장은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해 지난달 피의자로 공수처에 입건됐다.

공수처의 대검 공용폰 확보 과정을 둘러싼 논란은 법리적으로 적법한 압수수색의 범위 문제와 연결된다.

피의자의 참관 없이 그가 사용했던 휴대전화 속 정보가 수사기관에 압수수색의 형식으로 넘어갔을 때 이를 적법하다고 볼 수 있느냐의 문제로, 이날 대법원판결에서 쟁점으로 다룬 사안과 비슷하다. 다만 대검 감찰부가 공용폰을 임의제출 받은 건 수사가 아닌 감찰 과정에서 이뤄졌다는 점이 이날 대법원 판결이 나온 사건과 차이 있는 부분이다.

김선일 기자 ·연합뉴스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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