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한인사회 이끈 '권업회' 회원
12월의 독립운동가 전시회
이종호·김학만·최봉준 선생
이종호, 김학만, 최봉준은 권업회에서 한인의 권익보호와 민족의식 고취 등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들이다. 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0년대 한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연해주를 시작으로 이후, 전 지역으로 점차 확대됐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소식이 전해지자 재러 한인들은 성명회를 조직해 강제병탄의 부당함과 독립의지를 알렸고, 일제의 탄압으로 성명회가 해산된 후에는 조국 독립의 장기적인 방략 모색을 위해 1911년 12월 권업회를 조직했다.
이종호는 1907년 사립 보성학교를 경영 등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쓰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와 1911년 권업회 의사부 부의장으로 활약하며 권업회 운영 및 '권업신문' 발간에 필요한 비용 대부분을 기부하는 등 권업회의 중요한 재정적 후원자였다. 1914년 권업회가 해산되자 중국 왕칭현으로 이동하여 대전학교(大甸學校)를 건립하는 등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을 쏟았다.
김학만은 19세기 초기 러시아로 이주하여 1907년부터 계동학교(啓東學校)와 명동학교(明東學敎)의 설립과 운영을 적극 후원하며 이주 한인의 권익신장에 힘썼다. 1910년 한인거류민회 회장으로 당선됐고, 일제의 강제병탄에 맞서 성명회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하여 취지서를 발표했다. 1911년에는 권업회 총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위한 한흥동(韓興洞) 건설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권업회 해산 후에는 1919년 대한노인동맹단원으로 활약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최봉준은 19세기 함경도의 극심한 기근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한 후 군납업 등으로 자본을 모아 러시아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적극 투자했다. 1908년 러시아 최초 한글신문인 '해조신문'을 창간해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1911년 권업회에서 총재가 되어 '권업신문' 간행을 지원하고, 연추 지방지회에서 의사원으로 활약했다. 권업회 해산 후에는 1917년 고려족중앙총회 기관지인 '청구신보' 창간위원으로 활동하며 재러 한인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정부는 세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이종호에게 독립장, 2012년 김학만에게 애국장, 1996년 최봉준에게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