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평

청과 조선의 관계가 남긴 교훈

2013-08-08 10:58:39 게재

근대에 서방 열강들이 조선에 눈길을 돌리면서 청나라와 조공관계를 서방의 종주국과 식민지관계로 인식했다. 서방 열강들과 조선-청나라 관계는 늘 이 '속국문제' 테두리에서 국제관계가 이루어졌다.

병인양요 전 프랑스는 청나라 정부가 프랑스 선교권을 인정한 '중불 천진조약'을 조선에 적용할 것을 청에 요청했다. 청은 이를 거절한다. 이유는 조선이 청의 '속국'인 것은 맞지만 자주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프랑스는 병인양요를 일으킨다.

미국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에도 청은 조선이 정치 법령 종교 등을 자주적으로 행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셔먼호 사건으로 앤슨 버링검(Anson Burringahm) 미국 공사가 공친왕을 찾았을 때 공친왕은 조-청간의 조공관계는 의례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자주국이면 속국이 아니라는 것이 구미나라들의 인식이었다. 결국 미국은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청은 프랑스와 미국의 원정을 조선에 알려주어 조선이 대비책을 강구하게 했다. 그것 뿐이었다. 청은 조선과 서방열강의 충돌에 불간섭 정책을 펼쳤다. 왜 그랬을까? 아마 프랑스 미국의 조선 원정이 천주교 탄압이나 셔먼호 사건에 대한 복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조선에서 청의 전통적 지위를 흔들지 못한다는 판단이 한몫 했을 것이다.

임오군란 때는 달랐다. 청은 일본의 조선파병소식을 접하고 급히 조선에 대한 파병을 단행했다. 프랑스나 미국의 조선원정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역사는 청이 '종주국'으로서 '속방'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했다고 기록했다.

그렇지만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일주일 동안 청은 조선에서 군란이 일어난 줄도 몰랐다. 군란 소식은 일주일 후 청의 주일공사가 본국에 보고를 해서 알게 된다.

청나라 조선에 군사개입 모든 것 잃어

'종주국'이 '속국'에서 일어난 경천동지할 사건을 몰랐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임오군란으로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큰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근대사 이전에 한반도가 중국 정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역사를 바꾼 '위화도회군'이나 '인조반정'이 일어났다면 '임오군란' 이후의 한반도 정국은 중국의 정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청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중국 중심의 질서가 흔들린다고 판단, 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단행했다.

그 후의 갑신정변도 그랬고 갑오농민전쟁도 그랬다. 청의 개입은 공세적이었다. 그렇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은 처음으로 조선에서 전통적 지위를 잃게 된다. 그 후의 역사는 조선과 운명을 같이 하는 이른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역사였다.

청과 조선의 관계는 역사에 어떤 교훈을 남겨놓은 것일까? 전통적인 정책을 버리고 한반도에 군사적 개입을 해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으로 주변국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안무하여 안정시킨다'는 뜻의 수정( )을 앞에 내세웠다. 화린(和隣), 선린(善隣)을 강조했다. 이화위귀(以和爲貴) 처세철학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잘 지켜지면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공세적인 개입으로 바뀌면 위기가 몰려오곤 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군사개입 그리고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보여준 식민통치에 가까운 행보는 여기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청은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나섰지만 한반도도 잃고 자기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도 잃었다.

중국 근대사의 교훈, 한반도 정책에 반영

사실 그 이전의 임진왜란도 그렇고 그 후의 한국전쟁도 그렇고 한반도 군사개입은 늘 중국에 막대한 피해와 손실을 안겨주었다.

조선에 두번 출병한 명은 막대한 국력소모로 내리막길을 걷다가 결국 청에 망한다. 60년 전의 한국전쟁 때 역시 중국은 파병으로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이유야 어떻든 역사는 중국이 한반도에 직접 개입해 얻은 교훈을 전차지감(前車之鑒 - 앞에 지나간 수레를 거울로 삼는다)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역사의 기억은 오늘도 중국의 대한반도정책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이 유독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강조하는 것은 근대사 이후의 아픈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은 결코 그 역사를 재현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진징이(金景一) 베이징대 교수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