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업 경쟁력 갉아먹는 기술유출 막자

'솜방망이 처벌'에 국가 핵심기술 해외로 '줄줄'

2022-08-12 10:57:07 게재

사법부 양형 기준 강화 목소리 … 기술보호 강화 법안 11건 국회서 대기

최근 대기업 계열 바이오기업이 경쟁사로 이직한 직원들을 상대로 영업기밀 침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해 승소했다. 이직자들은 이 기업에서 습득한 기술 등 업무상 비밀을 새 직장에서 쓸 수 없게 됐다. 회사가 직원 이직에 민감한 것은 인력유출이 기술유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 기업들은 동종업계 이직 금지 조항을 채용계약서에 포함하기도 한다. 또 '영업비밀방어법'(DTSA)으로 유출을 방지한다.


하지만 영업비밀 보호제도가 도입된 지 30년이 지난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보호수준이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국가 핵심기술의 해외 유출은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전문가들에 따르면 국내 사법시스템은 기술유출 범죄에 솜방망이 처벌을 반복하고 있다. 기술유출 혐의를 잡고도 수사·재판에만 4년 이상 소요돼 실익이 없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또 민사소송에서 승소해도 손해배상액이 피해액에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해 연간 최대 58조원 추정 = 특허청이 미국, 영국 등 선진국 자료를 토대로 추산한 영업비밀 유출에 따른 국내 피해규모가 연간 최대 58조원에 달한다.

영업비밀이란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고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기술·경영상의 정보'를 말한다. 특허청에 기술을 공개해 20년간 독점권을 부여받는 '특허'와 달리 영업비밀은 비밀로 유지되는 한 영구적인 회사 고유의 기술이다. 영업비밀은 경쟁자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모방하는 것을 차단하고 차별화된 경영전략을 가능하게 한다.

영업비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코카콜라다. 코카콜라는 재료배합을 영업비밀로 보호하면서 130년 넘게 경쟁력을 유지하며 업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영업비밀 유출이 끊이지 않는 가장 큰 원인으로 '솜방망이 처벌'을 지목한다.

2016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수사의 기소율은 51%에 달한다. 하지만 정부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판결문 43건을 분석한 결과, 피고인 99명 중 9명(9.1%)에게만 실형이 선고됐다.

절반에 가까운 41명(41.4%)은 집행유예를, 15명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29명(29.3%)은 무죄 판결이 났다. 형사사건 평균 무죄 판결 비율은 2017년 3.3%, 2018년 3.1%, 2019년 2.9% 수준이었다.

최근 삼성 계열사 세메스 기술을 중국으로 유출한 일당에 대한 1심 선고가 내려졌다. 세메스 협력사 대표 A씨와 전 직원 B씨 등은 영업비밀과 기술 925개를 빼돌린 혐의를 받는다. 1심 재판부는 이들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법조계에서는 2·3심을 거치면서 집행유예나 벌금형으로 감형될 가능성도 제기한다.

윤해성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판례를 보면 기술유출범죄는 대부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며 "기술유출범죄가 국부를 유출하는 사실상 안보범죄이고, 기술이 침해되면 중소기업의 경우 망하게 된다는 심각성을 인식하고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


◆ '기술유출 해도 손해 볼 것 없다' = 기술유출 범죄와 관련된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은 지난 2019년 처벌수위를 높이는 내용으로 개정됐다. 현행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르면 보호해야 할 산업기술을 해외에 유출할 경우 징역 15년 이하 또는 벌금 15억 원 이하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또 국가 핵심 기술의 경우 3년 이상의 유기징역과 함께 15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 국내 유출의 경우도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실형이 선고되는 사례가 많지 않다는 반응이다. 이들은 솜방망이 처벌의 가장 큰 이유로 양형 기준을 꼽는다. 현재 국내 유출 행위의 기본 양형 기준은 8개월~2년이며, 해외 유출은 1년~3년 6개월이다. 죄질이 나쁠 때 적용되는 가중 영역도 국외 유출은 2~6년, 국내 유출은 1~4년에 불과하다. 실제 재판 현장에선 여러 감경 사유가 적용돼 집행유예나 벌금형 선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조용순 한세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기술유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법정형 강화도 필요하지만, 실제 형사처벌에 있어 유죄판결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양형기준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식재산 범죄의 경우 낮은 기소율과 높은 무죄율 등으로 소위 '솜방망이 처벌'이 계속된다면 '기술유출을 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져 더 많은 기술유출 범죄를 낳게 될 소지가 있다"며 "법정형 상향조정이 이미 이뤄진 만큼 양형기준을 높이기 위한 국민적 관심 유도와 피해규모 입증과 산정을 위한 법, 제도적 노력도 요구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권리보호를 지원하는 공익재단 경청의 장태관 이사장은 "재판을 통해 대기업의 기술유용을 인정받기도 어렵지만 인정받는다 해도 대기업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다보니 기술유용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업,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기술유출 사실을 증명하기도 힘들지만, 인정받아도 민사소송을 통한 보상이 손해액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것도 문제다. 정부가 2017년부터 2019년 사이에 진행된 영업비밀 민사소송의 1심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침해 인정 비율은 7%에 불과했다. 또 손해배상액은 중위값 기준 6200만원으로 낮은 수준이었다.

◆내부자 통한 유출이 대다수 = 최근에는 국내 핵심기술을 해외로 빼내려는 시도가 급증, 국가 경쟁력까지 위협받고 있다.

실제로, 국가정보원의 조사 결과 최근 5년 동안 발생한 국가 핵심 기술 유출 사건은 34건이다. 이중 31건이 반도체·자동차·디스플레이·조선·정보통신·전기전자 등 6대 국가 기간산업에 집중됐다.

손승우 한국지식재산연구원장은 "기업 경쟁력이 기술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커지면서 경쟁기업의 기술과 영업비밀 등을 획득하려는 시도가 치열해지고 있다"면서 "산업스파이의 기술유출 수법도 고도화 지능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비대면 환경 속에서 회사 시스템을 해킹하거나 보안시스템을 무력화하거나 또는 내부 협조자가 게이트를 열어주는 사례도 있다"면서 "내부자에 의한 기술유출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최근 어려워진 경제여건으로 인해 금전적 이득을 위한 범행이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권과 전문가들은 핵심기술과 우수인력 해외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기술보호 입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실제로 21대 국회 개원(2020년 5월) 후 12개의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발의자가 철회한 1건(고민정 의원안)을 제외한 11건은 소관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개정안들은 해외 기술유출에 대한 손해배상액을 높이고, 벌칙을 강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관련법 개정안을 발의한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현행법도 국가 핵심기술과 산업기술을 외국에서 사용하거나 사용되게 할 목적으로 유출하는 행위를 처벌한다"면서 "하지만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지고 있어 오히려 범죄를 부추길 가능성이 있고, 이마저도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현행법상 범죄가 성립되려면 '외국에서 사용되게 할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입증하기가 까다로워 처벌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며 "단순히 외국에서 사용될 것을 알면서 유출하는 행위도 처벌되도록 하고, 벌칙을 높여 국내 산업기술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핵심인력의 이직을 통한 기술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개인 역할을 하는 헤드헌터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술을 유출한 당사자는 산업기술보호법을 적용해 처벌할 수 있지만 헤드헌터는 무등록 영업에 한해서만 직업안정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다. 무등록 직업소개사업 행위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중개인들이 취하는 이익에 비해 처벌이 경미해 산업기술보호법에 '기술 유출 목적의 이직 알선' 관련 처벌조항을 신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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