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수 의사의 '영화 속 의학의 세계' (31)

영화관에서 만나는 질병들

2022-12-16 10:04:56 게재

고병수(아버지) : 요즘은 성소수자들의 이야기가 꽤 많이 영화로 만들어져서 쉽게 볼 수 있는데, 대부분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였어. 이번에는 나이 든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두 편의 영화를 보자.
고동우(아들) : ‘우리, 둘(Two of Us, 2019)’, ‘슈퍼노바(Supernova, 2020)’ 두 편을 봤어요. 앞의 것은 나이 든 레즈비언 영화이고, 뒤엣것은 나이 든 게이를 다룬 영화였어요.
고병수 : 둘의 성 관계를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진한 우정을 담고 있어서 감동이 컸을 거야.
고동우 : 맞아요. 나이 들었어도 그런 감정에는 이성애자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영화도 구성이나 장면들이 너무 멋져서 추천하고 싶어요.


성소수자를 다루는 영화들이 최근 많아졌다. 성소수자들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핍박받거나 오해를 받던 이들에 대해 사회가 어느 정도 용인하기 시작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다룬 영화의 공통점은 어리거나 젊은 짝들이 서로를 알아가지만 안타까운 이별을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뜨겁게 사랑하다가 헤어지게 만들어서 가슴을 울려야 하는 게 로맨스 영화의 공식인 듯… 그것이 영화의 맛을 더하는지 모르겠지만 인생은 청춘들만의 것이 아니기에 성소수자들의 장년이나 노년의 모습도 궁금하다면 이번에 소개하는 두 편의 영화를 보면 좋겠다.

우리, 둘

프랑스 어느 작은 아파트에 사는 70대 노년의 두 여성. 독일 출신으로, 여행 안내원 일을 하다가 은퇴한 니나(마틴 슈발리에)와 얼마전 남편과 사별한 마도(바바라 수코바)는 친구 이상의 사이로 20여 년을 같은 층 이웃으로 살아왔다. 마도에게 남편이 있을 때는 눈치 보며 만났지만, 혼자가 된 이상 둘은 편하게 연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개방적인 프랑스라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동성의 연인 사이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거나 죄를 지은 것처럼 바라보는 사회라서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2019년에 만들어진 ‘우리 둘(Two of Us)’ 영화이다.

니나가 여행 안내원 하던 시절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처음 둘이 알게 된 탓인지 마도에게 로마는 희망이었다. 둘이 로마로 떠나서 여생을 살기 위해 아파트도 내놓았다. 그러던 중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면서 일이 꼬였다. 다행히 마도는 의식을 되찾았어도 말을 못하고, 거동도 힘들어서 자식들은 간병인을 고용해서 모시도록 한다. 프랑스 의사인 폴 브로카(Paul Broca, 1824~1880)가 뇌 좌반구의 관자엽 부근이 말을 하도록 하는 언어중추라고 해서 ‘브로카 영역’이라고 지명했다. 외상이나 뇌졸중으로 그 부위를 다치게 되면 말을 알아듣기는 하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지만 언어 구성이 안 되어 발음을 하지 못한다. 마도는 아마 그 곳에 손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점점 간병인은 너무 자주 드나드는 니나를 수상하게 생각하고, 나중에는 딸과 아들도 둘 사이가 심상찮음을 알아버린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가면서 마도를 만나는 눈물겨운 니나의 노력이 다소 코믹하지만 영화는 내내 우정과 사랑, 그리고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면서 관객들의 시선은 계속 둘을 쫓아다니게 한다.



마도가 왜 남편보다 니나를 더 좋아했는지, 아들과 딸보다 니나의 말을 더 듣게 되는지 영화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짐작할 뿐이다. 돈을 바라는 것도,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닌 둘의 사랑을 영화는 그냥 덤덤이 지켜보게 만든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조용히 애원하는 듯한 영화. 그래서 제목도 ‘우리, 둘’이다. 잔잔한 리듬을 타면서 때로는 긴박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으며 영화는 세느강 물줄기처럼 흘러간다.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하고  말도 못하지만 간절한 눈빛으로 소리 없이 부르짖는 연기를 하는 바바라 수코바와 끝까지 사랑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마틴 슈발리에의 노년의 연기에 흠뻑 빠진다.

초신성처럼 빛이 되고자 했던 우정

중년이나 노년의 연인을 다룬 또 다른 작품을 하나 더 소개해 본다. 명연기자들인 콜린 퍼스와 스탠리 투치가 주연을 맡은 ‘슈퍼노바(Supernova, 2020)’는 로드 무비처럼 만들어졌다. 스탠리 투치는 우리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주로 조연으로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 2006)’에서 의상팀의 디자이너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둘은 인생 친구로서, 또 연인으로서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지내왔지만 빨리 진행되는 치매로 기억을 점점 잃어가는 터스커(스탠리 투치)와 그의 연인 샘(콜린 퍼스)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난다. 캠핑카를 타고 황야를, 깊은 계곡을, 단풍 곱게 물든 삼림을, 드넓은 호수를 다닌다. 오래 전 둘이 처음 만났던 호수에 서서 감회에 젖기도 한다. 그리고 늦은 밤, 차를 댄 호숫가 물 위로 반짝이는 별들.....

다시는 터스커를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괴로워하는 샘, 그런 샘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고 삶을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터스커. 영화는 둘이 연인이라기 보다는 오래된 친구라는 생각이 더 들 정도록 깊은 우정을 보여준다. 슈퍼노바(Supernova)는 천문학 용어로서 ‘초신성’이라고 하며, 일생을 다한 후 폭발하면서 몇 주에 걸쳐 강력한 빛을 뿜어내는 별을 말한다. 폭발과 함께 우주로 자신의 몸을 산산히 부숴서 내보내어 다시 어느 별을 만들어낼 자원이 되게 한다. 그렇다면 슈퍼노바란 제목은 샘과 터스커의 마지막 여행은 바로 초신성이 폭발하는 것이고, 여행을 통해서 그 동안 친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행복 에너지를 퍼뜨리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해리 맥퀸 감독은 영화를 잉글랜드 북서부에 있는 ‘레이크 디스트릭트 공원(Lake District National Park)’ 안에서 만들었다. 가을 산골을 지나가는 느낌, 우거진 숲길에 난 작은 도로를 지나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우리는 그곳의 풍광들을 영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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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수 의사
김규철 기자 기사 더보기